며칠을 연구실에서 밤 새우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달려간 영화관에서 나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대학 시절에 일본 만화 '드래곤 볼' 해적판을 읽는 아이들을 보며, 서투른 요리사가 언젠가는 자기 요리를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요리 수업을 하는 심정으로 국내 최초로 SF소설을 컴퓨터 통신망에 연재하던 때로부터 18년 만의 일이다. 전자공학을 가르치면서 SF 소설과 게임 기획 등에도 몸 담아본 나는 '디 워'를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 "줄거리가 없다"는 비평가들의 비난은 디 워가 영화에서 캐릭터, 게임까지 망라한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에 지극히 충실한 작품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라이온 킹'에서 캐릭터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라이온 킹'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인상을 깊이 심어 주어 아이들이 캐릭터 인형을 사 달라고 졸라대게 만들어야 한다. 주인공 '이무기'를 최대한 머릿 속에 각인시키려 화려한 전투 장면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나면 SF 소설을 제법 써본 나로서도 90분에 그 이상의 내용을 집어넣기가 힘들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는 한, 미처 설명 못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게임이나 소설에 담아내면 된다. 멀티미디어 반도체를 설계하면서 얻은 공학 지식으로 볼 때 디 워의 컴퓨터 그래픽(CG)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누군가는 '트랜스포머'와 비교하는데, 직선과 금속 질감의 트랜스포머와 곡선과 동물 질감의 디 워는 CG 연산시간이 수십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인간 시각 특성에 관한 연구에서도 완성도가 같더라도 눈에 익숙하지 않은 로봇보다 눈에 익숙한 뱀의 CG가 훨씬 어색해 보인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수십 편의 SF 영화를 본 내게도 디 워의 CG는 경이로울 따름이다. 나는 강의시간에 "반도체 산업에서는 제작시설도 중요하지만, 후속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설계 인력을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디 워가 CG를 제작하기 위한 핵심 소프트웨어인 CG 엔진을 자체 개발하지는 못했지만 자체 인력만으로 CG를 완성했고 충무로 CG 인력의 상당수를 양성했다는 것은 영화의 성공 여부를 떠나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핵심 반도체 장비 대부분을 외국에서 들여오는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솟은 것은 20여 년에 걸쳐 길러낸 반도체 개발 인력 덕택이다. 외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CG 엔진보다 이를 운영할 제작 인력이 없어 그 동안 한국에서는 '반지의 제왕'이, '토이 스토리'가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모자라는 점이 많은 영화지만 내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CG의 화려함이나 엔딩의 아리랑이 아니라 '우리도 이제 대작 SF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됐구나' 하는 감격이었다. 비평가들의 비난은 많은 부분이 옳고,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천만 명의 어른들을 즐겁게 해 주면 훌륭하고, 천만 명의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면 수준 낮은 것일까. 이무기가 승천하는 데 '아리랑' 대신에 락 음악이 흘러 나와야 옳은 것일까. 놀라운 예술성으로 관객을 졸게 만드는 영화보다 신나게 치고 받고 때려 부수는 영화가 반드시 못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하는 일이 없다. 주인공의 연기가 엉망이다"라는 말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디 워의 주인공은 배우들이 아닌 이무기다. 주인공인 이무기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데 도대체 뭐가 어때서?" 이성수 숭실대 전자정보통신공학부 교수 |
'openjournal아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악의 시나리오 (미국발 공황의 시작 ) (0) | 2007.08.14 |
---|---|
<연합시론> 남은 인질 19명도 전원 석방해야 (0) | 2007.08.14 |
김진홍 목사 성직자일까? 정치꾼일까? (0) | 2007.08.11 |
D-WAR 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0) | 2007.08.11 |
남북 정상회담에 거는 기대 (0) | 2007.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