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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국정홍보처장의 '왜곡된 언론관'이 복직반대 사유인가

이경희330 2008. 2. 19. 14:45
  
김창호 국정홍보처장
ⓒ 남소연
김창호

민주주의 작동원리 가운데 '법치(法治)'라는 게 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게 핵심이다. 쉽게 말해 재벌회장이나 노숙자, 모두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중기준이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최근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명지대 교수들의 반발로 복직에 애를 먹고 있다. 본인은 깊은 고민에 빠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암만 더러워도 결코 피해서는 안 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재직 시절 '인기가 없고', '일부 언론의 눈에는 공적(公賊)'처럼 간주됐다.

 

그러나 그가 각료로 재직하는 동안 벌인 사업을 문제삼아 '해직'하는 게 정당한가. 혹시 이중잣대가 적용되는 건 아닌가. 교수의 정치 참여와 복직에 대한 합리적 기준은 무엇인가. 민주주의 원리에 비춰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해직은 한 개인에게 대단히 가혹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와 명지대는 이 문제를 합리적 토론의 주제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언론관이 복직반대 사유, 정당한가

 

내가 홍보처장의 해직을 공론의 광장으로 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먼저 홍보처장이 추진한 '취재지원선진화 방안'이 언론탄압이기 때문에 해직돼야 한다는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 일부 언론은 지나치게 이 문제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명지대 교수협의회는 "왜곡된 언론관을 갖고 있는 김 처장이 디지털미디어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게 교수들의 여론"이라고 밝혔다. 복직을 반대하는 이유로 밝힌 바다. 그러나, 과연 이 같은 해직요구가 타당한가. 합리적 토론이 필요하다.

 

교수의 정치참여 문제를 논외로 치더라도, 설령 홍보처장 재직 당시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교수가 휴직기간에 정부활동을 한 것인데 그 활동의 일부를 문제 삼아 교수 신분을 박탈하는 것은 무슨 기준이 적용된 것이냐는 점이다.  

 

이명박정부에도 이미 교수들이 상당히 많이 진출했다. 또 계속 늘어날 것이다. 홍보처장의 복직을 막는 언론들은 이들이 임기를 마치고 복직할 때 같은 논리로  반대할까. 아마도 다른 논리를 적용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수의 직위 박탈은 한 개인에게 매우 중대한 일이다. 따라서 반드시 합리적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재의 방식은 '인민재판' 식이다.  

 

집행부의 정치적 판단

 

만약, 향후 사학에서 특정 집단의 반대를 명분으로 재단의 구미에 맞지 않는 교수들을 합리적 절차 없이 해고하거나 권고사직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정 집단의 힘과 논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면 그 잘못된 패악은 불을 보듯 뻔한 결론을 낳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문제있는 사학에 의해 부당 해직된 교수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의 힘겨운 복직투쟁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물론 김 교수를 이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해직은 신중한 절차를 통해, 법적으로 문제 없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교수와 학생의 권리문제를 우선적으로 제기해야 할 명지대 교수협의회가 '교수의 해직을 먼저 요구'하고 나선 것은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 명지대 교협은 복직 반대이지 해직요구가 아니라고 할 지 모르겠다. 또 집행부의 정치적 판단인지, 또 교협 내부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유사한 사례에 대해 이중기준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 편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반대편에 적용하는 기준이 다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정부가 선거를 통해 위임받은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코드인사'가 불가피한 지점이 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의 인사는 '실용인사'이고, 참여정부의 인사는 '코드인사'라는 이중기준을 적용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농담은 기실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통찰을 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우리는 일정한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유사한 현상에 대해 상이한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화가 되면 될수록 '타인에 대한 비판'의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면서 비판을 해야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래야 '비판을 위한 비판'도 적어진다. 합리적 소통의 문이 넓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공존의 기초가 마련된다.

 

이것은 보수의 문제만은 아니고 진보에게도 나타난다. 사실 나도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일했던 교수들이 복직할 때, 학생들이 거부하고 나서자 속으로 박수쳤던 일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정부에 참여했던 많은 교수들이 대학에 복직할 때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적이 고민된다.

 

합리적 토론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면서 급속히 '다원사회'가 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내부에 존재했던 암묵적 기준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합리적 판단기준과 일관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독재시대의 특수상황은 차치하더라도, 최소 87년 이후 민주화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사회적 변화를 고려한 새로운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

 

차제에, 민주사회에서 '교수의 정치참여 혹은 정부참여', 복직의 기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토론하는 기회가 열리기를 갈망한다. 또한 과거 독재 시기와 달라진 변화를 고려하면서, 개방된 토론을 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정치적 선호에 따라 평가하지 말고 종합 기준을 세우는 '합리적 토론'의 기회를 만들자. 선진화도 바로 이런 데서 이뤄지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