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정일 위원장이 1월 23일 평양 백화원 국빈관에서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접견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3일 자신과 가까운 왕자루이(王家瑞)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만나 '건재'를 과시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은 왕자루이에게 "한반도 정세의 긴장상태를 원치 않는다"고 밝혀 새로 출범한 미국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체면을 세워줘 수교 60주년을 맞는 북-중관계를 강화하면서도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촉구하는 다목적 포석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즉각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북-미간 대화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올해 들어 '통미봉남'(通美封南) 행보를 분명히 하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의도가 분명하게 엿보이는 대목이다.
건강이상설 불식
우선 김 위원장이 지난해 8월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졌다는 와병설이 제기된 뒤로 외빈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번 면담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된 건강 이상설을 불식시키고 외부 세계에 자신의 통치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보도된 이후 간헐적으로 관영 매체를 통해 사진을 공개해 건재함을 애써 강조해왔다. 김 위원장 본인도 지난해 11월부터 공개 시찰활동에 나서 외부세계에 건강 회복을 과시해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사진 조작' 가능성을 제기해왔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이날 외부인사에게 부자연스런 자신의 왼손을 보여주고, 북한 언론매체뿐만 아니라 중국의 신화통신이 찍은 사진 10장을 통해서도 자신의 외관을 공개함으로써 국가 통치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과시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공개된 외부 시찰 사진을 보면, 김 위원장의 왼손은 대부분 상의 호주머니에 넣은 채이거나 두툼한 장갑을 끼고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또 지난해 12월 1일 공군부대 시찰 사진에선 양손을 머리 높이로 들어 박수를 치기도 했으나 활동적인 오른손에 비해서는 여전히 부자연스런 모습이었다.
7개월 전보다 얼굴 수척
김 위원장이 외부 인사를 만난 것은 지난해 6월 18일 방북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의 면담 이후 7개월여만이다. 당시 같은 장소(백화원 국빈관)에서 찍은 시진핑 접견 사진과 이번 왕자루이 접견 사진을 비교해봐도 배가 들어가고 얼굴이 수척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김 위원장이 지난해 시진핑 부주석을 만났을 때는 두 손으로 시진핑의 손을 감싸쥐고 있으나, 이번에 왕 부장을 만났을 때는 훨씬 더 친근한 사이임에도 왼손은 늘어뜨린 채 오른손으로만 악수했다. 왕 부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했던 2004년 4월과 북한이 핵 보유를 선언한 2005년 2월 등 '중대 고비'마다 방북해 김 위원장과 회담을 했는데 조선중앙TV가 방영한 접견 기록영화를 보면 포옹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중앙TV와 신화통신 사진들 속에 비친 김 위원장의 모습은 수척해보이고 왼손은 다소 부자연스럽고 부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건강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오바마에게 대화 '신호'
이번 면담은 또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20일) 직후에 이뤄진 것이어서 적대국 정상과 만날 수 있음을 공언한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대화의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건강에 이상이 없고 정상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아가 오바마 대통령과도 만날 준비가 돼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이날 김 위원장은 "한반도 정세의 긴장상태를 원치 않는다"면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방중 초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6자회담) 각 당사국들과 평화적으로 함께 지내기를 희망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러자 로버트 우드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에게 김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좋은 일(good thing)"이라고 논평한 뒤 북한이 6자회담에서 이뤄진 핵폐기 합의를 지킬 것을 촉구했다. 우드 대변인은 또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고 힐러리 클린턴 신임 국무장관은 6자회담이 "유용하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당분간 북-중, 북-미간에는 대화 분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정세의 긴장상태를 원치 않는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에 비추어 지난 17일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을 통해 예고한 '대남 강경조치'가 당장 취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북한이 '통미봉남' 행보를 분명히 하고 있는 만큼 북-미간 직접대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자칫 1994년 북-미간 제네바 핵합의 때처럼 우리 정부가 소외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