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같은 현실, 엿같은 세상이다. 쥐의 해가 '去'하고 소의 해가 '來'하면 뭐하나. 해가 바뀌어도 대한민국의 비참은 그대로인 것을. 새해 벽두부터 그야말로 "희망이 절망"이다. 올 한 해 어떻게 버터야 하나, 아니 어떻게 싸워야 하나,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각설하고...
MBC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가 2009년 첫방송에서 청사에 길이 남을 멋진 클로징멘트를 날렸다.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식을 생중계하면서 이 자리를 가득 메운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를 교묘하게 거세시킨 KBS의 방송조작을 따끔하게 꼬집은 거다. 직접 들어 보시라.
"이번 보신각 제야의 종 분위기는 예년과 달랐습니다. 각종 구호에 만여 경찰이 막아 섰구요. 소란과 소음을 지워버린 중계방송이 있었습니다.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언론 특히 방송의 구조가 남의 일이 아니란 점을 시청자들이 새해 첫날 새벽부터 현장 실습교재로 열공했습니다. 2009년 첫날 목요일 뉴스데스크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방송사가 타방송사를 비판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다. 더구나 새해 첫날부터 그랬다면 보통 비상한 일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런 멘트가 나온 것일까?
신경민 앵커가 지적했듯이, 이번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식은 분위기가 예전과 사뭇 달랐다. 송구영신을 기리는 자리에 이명박 정권의 독재를 고발.규탄하는 촛불시민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팻말과 풍선, 그리고 한겨울의 추위를 녹여내는 큰 구호에 담아 내보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보신각 주변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이런 모습은 타종행사를 생중계한 KBS 1TV 화면에 전혀 잡히지 않았다. KBS는 정권타도를 외치는 시민들이 행여 앵글에 잡할 새라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진행자와 무대만 싸고 돌았다. 현장의 소란은 볼륨업 된 가수들의 노래와 급조한 가상의 박수소리로 대체됐다.
보신각 타종장면을 생중계한 KBS 1TV와 인터넷방송(아프리카 사자후TV) 생중계 화면을 실시간으로 비교한 아래 그림을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라쿤'이라는 네티즌이 'KBS 보신각 생중계가 보여준 2009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동영상의 몇 장면을 캡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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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거 '라쿤'이 올린 동영상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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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국민들이 '착한' 권력에 맞서는 19금스러운 화면을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는 KBS의 눈물겨운 몸부림이 이와 깉았다. 덕분에 현장의 촛불이 모두 휘발되고 축하공연만 넘실거리는 훈훈한 '2009 MB 환타지아'를 구경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국민들의 발걸음이 KBS 홈페이지 '뉴스게시판'에 쇄도하기 시작했다. 1일 하루에만 1,000여건의 항의글과 비난글이 몰렸을 정도. 제목을 잠깐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분노와 절망을 로 체감하실 수 있을 게다.
"새해 첫날부터 조작방송이라니...", "종각이 축제 인파로 가득찼다고?", "타종소리가 그리 작게 나오는건 처음이네요", "완전 국민 기만", "시청료 반납해라", "어용방송국",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방송장악 실태를 그대로 보여준 오늘", "KBS 진짜 이건 아니잖아", "와우! 기술력 대단~", "오늘부터 시청거부 들어갑니다", "축! 정부군 kbs 완전 점령", "당신들은 영혼을 팔았어", "KBS 수신료 거부합니다", "역사 앞에 두렵지 않은가", "당신들 때문에 눈물이 난다", "이 정권이 몇년이나 갈 것 같냐", "권력의 개가 된 KBS", "앞으로는 조중동과 KBS를 하나로 부르겠습니다", "KBS 이제 생명 끝났다", "80년대로 돌아간 영혼없는 KBS", "공영방송의 깃발을 내려라", "정부의 개노릇 하느라 욕보십니다", "kbs 니 더러운 얼굴에 침을 뱉는다", "1박2일아 미안~"... 기타 등등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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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게시판에 쏟아진 분노의 목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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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1월 2일자 조선일보에 KBS 대신 MBC를 때리는 뜬금없는 사설 한 편이 올랐다. < MBC 연기대상, 아까운 전파로 중계나 말든지>란 제목을 단 사설이 그거다.
사설은 "30일 밤 10시부터 31일 새벽 1시까지 3시간 가까이 방영된 MBC 연기대상 중계가 끝나자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 항의 댓글이 쏟아졌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 항의댓글이 쏟아진 것을 따지지면, 앞서 살펴봤듯이 시기적으로나 비중에서나 KBS 조작방송 사태가 우선일텐데, 조선일보는 왜 이 문제에는 입 다물고 허접한 MBC 연기대상 논란만 물고 늘어지는 걸까?
방송국 연기대상은, 사설도 지적했다시피, "방송국 사람들의 집안잔치"에 불과하다. 공동수상을 남발해서 보기 안좋았다고는 하지만, 3일이나 지나서 새삼스레 이걸 사설로 다시 되새김할 정도는 아니다. 조선일보가 스포츠신문이라면 몰라도.
생각해 보라. 지금 이 시점에서 '강마에 신드롬'을 일으킨 김명민이 대상을 수상했어야 하네 마네 따위를 거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칭 '대한민국 일등신문'이 이런 걸 가지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남세스럽고 민망한 일 아닌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이런 문제로 뒷북사설을 작성할 만큼 대한민국 상황이 한가한가?
그렇지 않다는 건 조선일보가 누구보다 잘 안다. 2009년 1월 1일 신년사설에서 "새해 새 아침 세계 모든 나라가 생존이란 단어와 씨름하고 있다"며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목젖을 떤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 아닌가?
그런데도 조선일보가 허접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기대상 논란을 붙들며 MBC 게시판에 네티즌들의 항의댓글이 폭주하고 있다는 식으로 사설을 작성한 저의는 무엇일까? 이유는 이것 하나 밖에 없다. 곧 KBS 조작방송에 쏟아진 국민적 공분을 물타기하고 시선을 분산시키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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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한별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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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지 않는가? 전임 노무현 정권 시절, 편집방송 의혹을 받은 MBC <신강균의 사실은..>과 KBS의 정동영 '노인 발언' 보도를 강력히 성토하면서 "정권의 본부나 된 듯이 특정 의도로 자의적인 편집을 하면서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가를 보여준 것" 내지는 "방송들의 이 같은 당파적 편집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국민들이 얼마나 더 방송이 조작한 허구의 세계에 농락돼야 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사설, < KBS MBC, 이래도 ‘公營’ 팻말 계속 달 건가>, 2004.4.5) 운운하며 핏대를 곧추 세우던 조선일보가, '명명박박한' KBS의 조작방송 사태를 보고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도 모자라 KBS를 구하기 위해 해묵은 MBC 연기대상 논란까지 끄집어내 죽은 몸뚱이에 다시 몽둥이찜질을 해대고 있다는 게?
그래서 생각하면 할 수록 "엿같은 현실"이고 "엿같은 세상"이다. 해가 바뀌어도 대한민국의 비참은 그대로고, 새해 첫날부터 "희망이 절망"이다. 절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는데, 아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빌어먹을!
문한별/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