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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체에 담긴 대통령들의 성격

이경희330 2009. 3. 4. 00:15

그도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선국후기’.


현직 검사인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44)가 항일운동가들과 친일파 인물들의 친필을 수집·분석해 이들의 품성과 삶을 재조명한 책 <필적은 말한다>(중앙북스)를 펴내 화제다. 구 교수에 따르면 글씨에 사람의 성정과 기질, 또 학식과 정신적 수준까지도 담겨 있다고 한다. 구 교수는 “학식이 높은 사람은 글씨가 완숙하고, 선 굵은 대인의 면모를 가진 사람은 글씨가 크고 속도도 빠르며, 곧은 품성을 가진 사람은 글씨에 힘이 있고 최소한 정제된 균형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분석을 응용한 ‘필적심리학’은 범죄수사에 다양하게 이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들의 ‘글씨’에는 어떤 특징이 담겨 있을까. 그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글씨를 가진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평생 서예를 연마했기에 ‘명인’이라 불릴 만큼 글씨의 기교가 빼어나며 한글뿐 아니라 한자, 영어 필체도 유려하다는 것.

구 교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필체는 굳세면서 부드러워 의지가 강하고 인간적인 완숙함을 갖추고 있었다. (필체가) 반듯하고 규칙적인 것은 내면이 확고하고 원칙을 중시하며 보수적인 성향임을 보여주고, 유연성이 있는 것은 사회성이 좋은 성향을 담고 있으며, 글씨 간격이 좁은 것은 자의식이 강한 성격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글씨를 매우 길게 썼는데 이는 자신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성격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도 서예에 능해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가 쓴 글씨 ‘落山雲表’(낙산운표)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꾸밈없고 소박하다는 평. 정확하게 정사각형을 이룬 것과 선이 다소 약한 것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바른 사람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인기 있는 글씨의 주인공은 박정희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의 글씨는 요즘 수천만 원을 호가할 정도라고. 박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 시절 김용하 선생에게 글씨를 배웠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손재형 선생에게서 사사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손재형 선생의 필체와는 많이 다른 것이 특이한 점.

구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은 군인 출신답게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글씨체를 보인다.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으며 얼핏 보면 굳센 듯하나 자세히 보면 부드러움이 굳셈을 가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흡사하게 글씨가 유려하고 필체에 힘이 있다고 한다. 필체로 보아 박 전 대통령은 강하고 반듯하지만 인간적인 부드러운 면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서법에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쓴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예 실력이 좋은 편. 김 전 대통령은 서법을 잘 지켜 썼고 부드러움이 힘에 앞서 기교가 천진함을 누르는 필체라고 한다.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민주 구국의 길’이라는 김 전 대통령의 글씨를 보면 육질이 풍부하고 세파에 잘 적응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구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글씨가 정사각형의 형태와 멀고 상당히 유연한 것으로 보아 사회성, 대중성이 있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또 “행 간격이 좁은 것은 배려가 적은 성품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의 글씨가 전국 명소를 뒤덮은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인천공항에 휘호를 남겨달라는 요청도 사양했다는 후문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