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대 법과대학생 김형우 씨(가명)는 수강신청기간 고심해 짜놓은 시간표가 엉망이 됐다. 신청한 수업의 강의를 맡은 교수들이 갑자기 다른 대학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학기 시작 한 주 전 채용을 거쳐 '대타'를 맡은 교수는 미처 수업계획서와 강의안조차 준비하지 못한 상황. 김 씨는 어쩔 수 없이 급조된 수업을 듣게 됐다.
◆개강 앞두고 법학교수 쟁탈전 수면 위로
A대는 개강 한주를 앞두고 서둘러 법학부 교수 초빙 공고를 냈다. 로스쿨 유치를 준비하는 타 대학에 교수를 뺏겼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교수 6명이 빠져나가는 통에 지원자의 이력서 한통과 연구목록만 검토한 후 서둘러 머릿수부터 채우는 꼴이 됐다. 새로 채용할 교수의 교육·연구실적을 찬찬히 검토하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
수도권 B대도 이번에 15명의 교수를 채용했다. 원래 12명의 교수를 채용할 계획이었지만 타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3명의 교수 때문에 인원을 늘린 것이다.
내년도 로스쿨 개원을 앞두고 대학간 법학교수 확보를 위한 막바지 다툼이 치열하다. '5년간 연구실적 800% 이상'이라는 평가기준을 감안하면, 타 대학 우수교수에게로 눈길이 쏠릴 수 밖에 없다. 법학교수 전체 풀(pool)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물밑 스카우트가 불을 뿜는 가운데, 과잉경쟁에서 오는 피해가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으로 되돌아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먹이사슬의 최정점에는 서울대가 있다. 서울대가 로스쿨 교수 특별채용을 타대학에 비해 최근 뒤늦게 실시하면서 법학교수들의 자리이동이 도미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방향은 '지방대 → 수도권대 → 서울 주요사립대 → 연고대 → 서울대' 순.
최근 서울대 법과대학의 내부 심사를 통과한 인원은 15명선으로, 이중 타 대학 법학교수만 7~8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30일께 서울대 본부 인사위원회를 거쳐 이들의 채용이 확정될 예정이다.
호문혁 서울대 법과대학장은 "서울대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법과대학은 그간 우수인력이 판·검사와 변호사로 빠져나가 학문 후속세대 양성이 부진했다"면서 "로스쿨 유치를 계기로 우수한 분들을 모셔오는 게 당면과제였다"고 해명했다.
연세대와 고려대도 속내는 비슷하다.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뺏어오는' 입장이라 다른 주요 사립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긋한 편이다. 홍복기 연세대 법과대학장은 "타 대학들 사정에 가타부타 할 말은 없다"며 말을 아꼈다. 하경효 고려대 법과대학장도 "9월1일부로 발령이 나면 알게 될 일이다. 민감한 사안이라 미리 말할 수 없다"면서 타 대학들의 불만을 경계했다.
◆서울대 일등주의, 정부 졸속추진이 문제..2학기 수업 "부실"
호문혁 서울대 법과대학장은 법학교수들의 연쇄이동 현상에 대해 "로스쿨 법안의 국회 통과 후 일정이 너무 빡빡해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서도 "교수 본인과 각 대학의 사정과 조건에 따라 이에 맞으면 옮겨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로스쿨 유치를 위해 애써 교수를 충원했다가 타 대학에 뺏긴 대학들은 억울한 표정이다. B대 법과대학장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기 불과 며칠 전에 사표를 내는 교수들도 있다. 개강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결국 학생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며 "전국 법과대학들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대의 '일등주의'도 빈축을 사고 있다. C대 법과대학장은 "느긋하던 서울대가 자칫 연세대나 고려대에 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교수를 초빙해 이 같은 도미노 현상이 발생한 것"이라며 "이대로 가다가는 지방대 법과대학은 교수가 부족해 운영 못하는 사태가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A대 관계자도 "서울대 내부에서도 그간 넋놓고 있다가 급히 법학교수 초빙에 나섰음을 인정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고려대도 물밑 작업을 따로 진행하면서 형식적으로 교수 초빙공고를 냈다"면서 "교수 이동 현상 자체도 문제지만, (타 대학의 사정을 외면한) 페어플레이 실종이 더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정부의 로스쿨 졸속추진도 이와 맞물려 문제를 확대시키고 있는 형국. 당초 지난 2월 법안 통과를 예상했다가 7월에 들어서야 통과되는 등 일정이 늦춰졌음에도 정부가 당초 일정을 무리하게 강행하면서 혼란이 가중된다는 설명이다.
김문현 이화여대 법과대학장은 "아직까지 로스쿨 인가 기준안도 안 나온 데다 입학 총정원 등 민감한 사안이 결정된 게 없다. 시간까지 촉박해 로스쿨 유치를 준비하는 대학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면서 "좀 더 여유를 갖고 로스쿨 추진일정을 재조정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대학간 신경전 속 문단속.. 교수사회도 "쩐의 전쟁(?)"
대학간 물밑 스카우트전이 본격화 되면서 타 대학에 법학교수를 뺏기지 않으려고 대학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경효 고려대 법과대학장은 "사직 의사를 표한 교수가 없다. 현재로선 타 대학으로 옮기려는 바가 한 건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면서도 여전히 긴장감을 늦추지는 않는 모습이다.
성균관대도 아직까지 법학교수가 다른 대학으로 옮긴 사례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여전하다. 이미 성균관대 법과대학 교수를 겨냥한 타대학의 개별적 스카웃 제의 소식을 접했기 때문. 다행히 스카웃 제의를 받은 교수가 근무 여건을 고려해 잔류를 택했다는 전언이다. 박승철 성균관대 교무처장은 "이 문제를 예의주시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 처장은 "로스쿨로 인한 대학간 대규모 이동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지만, 9월 1일자로 발령이 나야 교육부에 신청하기 때문에 뺏기는 대학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변호사 출신 실무교수 3명을 채용한 서울 D대는 다음달 다시 채용공고를 내고 9명의 교수를 더 충원할 계획이다. 최근 소속 교수 1명이 사표를 내고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기는 등 추가 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D대 법과대학장은 "교수 채용을 서두르기보다는 내년 3월1일자로 발령낼 계획으로 천천히 충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로스쿨 인가와 관련한 교수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교수사회가 '쩐의 전쟁'으로 전락했다는 후문이다.
<대학팀>
김봉구 기자 (hr_bong@un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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