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고려대 교수 된 건 인생 최대의 축복" |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필상 고려대 총장 |
경기도 화성 출신의 이필상 신임 고려대 총장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오직 농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출세도 필요 없고, 아버지의 논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저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던 소년이 국내 명문 사립대학의 총장이 되기까지는 두 번의 인상적인 순간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 귀한 땅을 팔아 자신의 학비를 대주시는 것을 알고 난 직후와 공대생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사표를 내야 했던 첫 직장시절 때였다. 덕분에 그는 공부의 재미를 알았고, 자신이 공대보다는 경영학 계통에 더 적성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된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20여년이 넘게 고려대 학생들로부터는 좋은 교수님이라는 호평을 듣고, 교수 사이에서도 두터운 신망을 쌓았으며, 한편에서는 명망 높은 시민운동가 1세대 인물로 활약하면서 학자로서의 사회적 소임을 다하기도 했다. 이필상 교수가 오늘 제 16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비 고대 출신으로는 두 번째, 시민운동가 출신으로는 첫 번째로 국내 명문 사립대학의 수장이 되면서 화제를 모은 인물. 이필상 총장이 들려주는 그의 인생과 대학 운영의 비전을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이필상 고려대 총장 - 어릴 땐 농부가 되고 싶으셨다고요? 네.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논이 적었어요. 10마지기 정도 농사를 지었는데요. 다른 집이 타작할 땐 볕갈이가 굉장히 크고, 쌀가마도 많이 쌓이는데, 우리는 얼마 안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땅도 많고, 쌀도 많이 얻고, 부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 제물포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여전히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고요? 당시엔 좋은 학교였고, 들어가기 힘든 학교였기 때문에 합격했을 땐 엄청 기뻤어요. 그런데 들어가 보니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좀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열심히는 했습니다. - 그 강박관념이 아버님과 연관되어 있다고요? 중학교 때만 해도 철이 없으니 등록금은 당연히 아버지가 대주시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자취할 땐 집에서 쌀도 사주고, 반찬도 해주니까 큰 불편 없이 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집에 가니까 우리 밭에서 다른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 학비랑 하숙비 때문에 밭을 파셨던 거죠. 조상 대대로 물려온 땅을 내 공부 때문에 팔았으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열심히 공부해서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이후부터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요. - 서울공대 입학 후 유신정권 반대, 삼선개헌 반대에 참여하셨는데요. 당시엔 서울공대 바람이 불어서 공부 잘 하면 무조건 서울공대를 가는 풍조였어요. 그래서 저도 서울공대를 가게 됐는데요.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대학생들이 모이면 나라 걱정, 정치 걱정도 하고, 독재 치하에서의 분노를 서로 공감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학생회 간부를 했기 때문에 유신 반대 데모에도 나가게 됐죠. 공과대 학생들이 대규모로 데모를 하면서 휘경동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작전에 걸렸어요. 맨 앞에서 가다 보니 전경들이 까맣게 몰려있더라고요. 그래서 뒤로 도망가려고 하는데, 허리가 끊겼더라고요. 전경들이 중간에서 허리를 자르고 들어와서 선두에 선 사람들 100명을 체포하는 거예요. 그래서 뿔뿔이 도망을 갔는데요. 도망가다 보니 벽돌 찍는 공장이 있더라고요. 인부들이 장기를 두고 있기에 제가 인부 옷으로 갈아입고 장기 두는 척 했어요. 경찰이 잡으러 들어왔다가 인부인 줄 알고 그냥 가더라고요. 그때 잡혔다면 인생의 길이 달라졌을 거예요. 다행히 안 붙들려가고 학교를 마친 뒤에 취직하게 됐죠. - 그런데 첫 직장은 전공과 상관없이 금융회사에 들어가셨죠? 전 금속공학을 공부했고, 제가 가고 싶은 곳은 포항제철이었어요. 하지만 그때 신입사원을 뽑질 않아서 못 갔어요. 저는 외아들이고, 집에서 농토를 다 팔아서 생계가 불안한 상태라 빨리 취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늘 취업 게시판만 봤어요. 근데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에서 채용 공고가 났더라고요. 응모 자격을 보니 '성적 우수한 자, 영어 능통한 자, 품행이 방정한 자' 등 너무 우수한 사람을 뽑는 거예요. 제가 해당되는 항목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급박하니까 응모부터 했죠. 알고 보니 그 회사는 당시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차관을 들여다가 차관 자금을 심사해서 우리나라 기업에게 대출해주는 기관이더라고요.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융기관이었죠. 그런데 팔자란 게 있나봐요. 접수를 하고, 필기시험을 봤는데 영어가 너무 힘든 거예요. 전 공학을 전공해서 경제에 관련된 영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어시험을 굉장히 못 쳤어요.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친구 집에서 놀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집에 가보니 전보가 와 있더라고요. 면접하러 오라고요. 그런데 면접 시간을 보니 그날 10시인 거예요. 그때가 11시였거든요. 그래서 얼른 택시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갔는데, 택시기사가 빨리 운전하느라 서소문에서 사고를 낸 거예요. 근데 택시기사 분이 빨리 가서 면접하라면서 택시요금도 안 받으시더라고요. 그래서 허겁지겁 갔더니 1시쯤 됐고, 면접관들이 점심 먹고 와서 면접하게 됐어요. 그래서 금융회사에 들어갔죠. - 회사를 그만 두고 유학을 떠난 이유는? 금융회사에 들어가니 신사복 입고 일을 하고, 월급도 많이 주고, 아주 좋더라고요. 여기서 뼈를 묻고 살고 싶을 정도로 직장생활이 만족스러웠어요. 근데 제가 공대 나와서 금융기관에 다니다보니 한계가 보이더라고요. 지식이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공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은 여기서 일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보이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요샛말로 왕따라고 하죠. 심지어는 식당에서 뭘 시켜먹어도 "이 사람은 공대 나와서 이런 걸 시켜먹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저한테는 가슴에 많이 와 닿았죠. 이러다가 여기서 내 인생 주저앉는 것 아니냐, 인생을 뒤집어보자는 분노가 쌓이다가 폭발해서 유학을 가게 된 거예요. 그 때가 29살이었는데요. 직장생활 4년차에 결혼해서 아기까지 있는 상황이라 유학 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내 인생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작은 집을 마련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요. 유학 갈 생각을 하니 부모님은 어쩌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후에 은행에 유학 좀 보내달라고 요청했어요. 석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은행을 위해 열심히 일할 테니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휴직이라도 시켜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어렵대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사표도 안 되냐고 대들었어요. 그랬더니 바로 잘렸는데, 의외로 퇴직금이 꽤 되더라고요. 그때가 76년이었는데 120만 원 정도 퇴직금이 나왔어요. 당시 망우리에서 250만원이면 집을 살 정도였으니 120만원이면 꽤 큰돈이죠. 그걸 부모님께 갔다 드리면서 "이 돈이면 2년 넉넉히 사십니다. 그동안 저는 유학을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당혹스러워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자식이 유학 간다는데 말릴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 유학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돈 문제도 있었지만 제일 어려웠던 건 강의실에 들어가니 말이 들리지 않는 거예요.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 같은 말을 들으면 '눈을 작게 뜨고 크게 뜨면 경제학을 달리 공부하는 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던 때였거든요. 어떻게 석사를 마칠지 앞에 깜깜하더라고요. 정말 좌절했던 건 중간고사 때 거시경제학 시험을 봤는데, 시험지에 점수가 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네가 뭔가 열심히 썼지만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점수를 못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은행에 있었으면 돈도 많이 벌고, 시골에 땅도 샀을 텐데 이게 뭔가, 하늘이 깜깜하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너무 걱정 말고, 기말고사 잘 보면 점수 줄 테니까 열심히 하라'면서 용기를 주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용기 반, 오만 반으로 공부만 했죠. - 어려운 순간 자신을 일으켜 세운 건 무엇이었나요? 가장 큰 건 부모님이었죠. 부모님이 희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가 돼야 한다는 거요. 그리고 작은 것 중 하나는 여기서 경영학 석사를 따서 다시 그 은행에 가고 싶었어요. 내가 다시 여기 왔다! 그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랄까요. 그런 걸 꼭 하고 싶었어요.(웃음) 그런데 석사를 마치고 나니까 제가 달라지는 걸 느끼겠더라고요. 은행으로 돌아가서 큰 소리 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어요. 관용이 생겼다고 할까요. 게다가 그 사람들이 날 기억도 못 할 텐데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크게 생각하자, 여기까지 왔으니 공부 좀 더하자 싶어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갔죠. 박사 과정 들어가면 공부가 굉장히 어려울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근데 오히려 공부하기가 편하더라고요. 석사 때는 사례 연구니 토론이니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많이 해야 했는데 박사 과정에서는 자기 분야 이론을 공부하고, 새로운 수식을 유도하고, 자료를 분석하는 등 전부 자기 혼자 하는 거라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미국의 우수한 대학은 박사 과정에 입학시키면 돈에 대해선 걱정을 안 하게 해줘요. 등록금 면제 뿐 아니라 생활비도 주거든요. 석사 과정 때는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박사 과정 땐 등록금을 안 내도 되고 생활비도 넉넉히 살 정도로 주더라고요. 돈이 남아서 부모님께 돈을 부쳐드리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교단에 선 건 언제였나요? 82년이요. 그때 제가 처음으로 한 건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한 거였어요. 나는 한국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우리 말 용어를 모른다, 그래서 영어 용어를 써서 할 테니 양해를 해달라고 얘기했어요. 대신 나는 강의를 잘 할 자신은 없지만 정직하게는 하겠다, 강의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얘기하고 공부해서 가르쳐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정직은 우리나라 경제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교수로서 정직한 판단을 해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학생들과 약속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경제나 사회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비판을 많이 하는 교수로 인식됐어요. 그때는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들어설 때라서 무서울 때였어요. 무슨 얘기든 다 확인이 되고, 잡혀가기도 했었죠. 그래도 저는 '내가 고려대 교수로서 우리 경제에 대해 그런 것도 얘기를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싶어서 솔직한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렇게 망치면 안 된다고 혹독한 비판을 했죠. 그런데 그때는 병아리 교수라 들리지도 않는지 안 잡아가더라고요.(웃음) - 학문적 양심을 지키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나요? 신들린다는 표현이 있죠. 강단에 올라서면 저를 잊어버려요. 저도 모르게 열심히 강의를 하고, 다른 건 생각 안 하고 얘기하게 되더라고요. 다 말하고 나선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교수로서 그런 얘기도 못 하면 말이 안 된다고 계속 자기 정당화를 해갔죠. - 시민운동가 1세대로 경실련의 경제정의연구소장을 맡으셨는데요. 경실련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80년대 말에 정경유착비리가 심하고, 땅값이 많이 오르고, 빈부격차가 심화됐어요. 우리나라 시장경제가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싶어서 몇몇 교수들이 경실련에 참여해서 문제 제기를 하고 목소리를 낼 때였죠. 그때 우연히 경실련 토론회에 참석하게 됐어요.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공감을 많이 하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막 떠들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경실련 활동에 참여하게 됐어요. 당시 제가 주장했던 건 금융 실명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 정경유착의 비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국민의 재산인 돈을 관리하는 한국은행이 정치권력에 예속되다보니 돈을 마구 찍어내서 일부 기업이나 특정인에게 특혜가 갔어요. 중소기업이나 일반 서민들은 그 그늘에서 가난해질 수밖에 없고, 물가 불안까지 떠안아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했죠. - 4년 전에 이미 고려대 총장 선거에서 당선된 적이 있죠? 당시엔 직선제였어요. 그래서 일단 당선이 되면 대개 재단이 수용하는 형태였어요. 근데 법적으로는 재단 산하의 총장추천위원회라는 법적 기구를 통해 선임돼야 하는데, 저는 직선에 당선됐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제가 학교를 위해 양보하겠다고 물러섰죠. - 고려대 출신이 아니라서 승인 받지 못한 건가요? 꼭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 연세대 출신의 고려대 총장, 혹은 고려대 출신의 연세대 총장이 나오는 시대도 올까요? 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국내에서 경쟁하는 차원이 아니에요. 지식에 관한한 무한경쟁시대이기 때문에 외국대학과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학 운영을 해야 해요. - 전임인 어운대 총장은 CEO형 총장을 표방하셨는데요. 대학은 양면이 있습니다. 돈을 끌어다가 발전시키고 투자를 해야 하는 CEO형 총장의 필요성도 있고요. 한편으로는 학문을 올바르게 발전시켜야 하는 학자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CEO형 총장과 학자형 총장을 이분법적으로 얘기하는데, 두 가지가 조화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전공이 경영학이니까 CEO적인 측면에서 역할을 하고 싶고, 또 24년 동안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친 학자로서 우리나라 학문 발전에 좋은 역할도 하고 싶어요. 두 총장의 역할을 조화시키는 총장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고려대 교수가 된 것이 인생 최대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보람 있게 학교생활을 했어요. 민족을 올바르게 일깨우고, 민족의 앞날에 뭔가 길을 가르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얼마나 소중한 직업인지 몰라요. 그리고 학생들이 그렇게 교수를 존경하고, 따르고,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대학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별합니다. 여의도에 가면 경영학과 출신들이 많은데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다른 사람들 시선에 상관없이 큰 소리로 인사해오는 건 고려대 출신밖에 없어요.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학위 수여를 받으러 갔을 때 학생들이 막았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드리기로 하고 손님으로 모셨으면 정중한 대우를 하는 게 기본예의입니다. 어쨌든 불상사가 났다는 것에 대해 우리로서는 마음 아픈 일이죠. 학교 내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그런 논의들을 수용하고 영예롭게 학위를 받게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기여 입학제를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는데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기여 입학제를 수용할 만한 상황이 안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돈을 내고 학교를 들어가냐는 당연한 반대가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조금 뒤집어 생각하면 떳떳하게 땀 흘려 번 돈을 뜻있게 쓰는, 돈에 대한 도덕성만 확보된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어요. 학교에서 기부를 받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등록금도 면제해주고 생활비도 지원해주고 잘 쓰면 여러 사람이 함께 공부할 수 있죠. 사회적으로 용인만 된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면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잘 발전돼서 정착되어 있는 제도니까 우리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죠. - 신임총장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학교 발전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국내 경쟁대학과 비교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다는 벤치마킹을 많이 하는데요. 이제는 벤치마킹을 국내대학에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버드나 캠브리지 같은 세계 명문대학을 벤치마킹해서 국제적인 무대에서 역할을 하는, 학문을 수입만 하는 게 아니라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대학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세계무대에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비출 수 있는 세계 속의 명문대학으로 학교의 발전 방향을 잡고 싶습니다. ▶ 진행 : 공지영 ▶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월~토 오후 4시 5분~5시) ▶ 한글주소 : 특별한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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