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역사관

늦봄 문익환목사님이 걸어온길

이경희330 2010. 8. 7. 22:39

 

늦봄문익환[文益煥, 1918.6.1~1994.1.18]

출생과 배경

늦봄 문익환은 1918년 6월1일 옛 고구려 땅인 만주(滿洲) 북간도(北間島)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1985년 작고)과 어머니 김신묵(1990년 작고)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 명동촌은 안중근이 사격연습을 하고 이동휘가 드나들던 곳, 곧 국내에서 나가는 애국지사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어 마을 자체가 독립운동 결사체였습니다. 조국을 잃은 민족의 울분과 민족해방에 대한 희망이 섞인 땅이 그 분이 세상에 나온 곳이었죠.
그의 집안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그 신앙은 민족주의에 닿아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윤동주, 송몽규 등과 죽마고우였고 그 자신이 하늘과 별과 맑은 마음을 노래한 시인이었습니다. 이런 성장 내력은 그의 일생을 결정지었답니다.

 

 


교사, 목사, 교수, 시인으로

소년 문익환은 1924년 김약연, 문치정 등 민족선각자들이 세운 공동체학교인 명동학교를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합니다. 이어서 용정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합니다. 그러나 이듬해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가담 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1937년 용정 광명중학교를 졸업합니다. 1938년엔 일본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가 1943년 학병을 거부하고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여 만주 일대에서 교회전도사로 일하던 중 해방을 맞아 1946년 귀국합니다.
   그 뒤 부모가 있는 김천 구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도 하고 부친이 세운 배영중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유니언신학교에서 수학합니다
   1947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한빛교회 목사로 일하면서 한국 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수로 구약학을 강의하였습니다. 1968-1976년에는 한국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처음으로 함께 했던 히브리어 성경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공동번역성서> 작업에 구약번역 책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구약의 시편에 깊은 감명을 받고 시인이 됩니다.

암울한 시대, 민주와 통일의 지도자로..

늦봄이 박정희 유신독재의 칼날 앞에 몸을 들이댄 때는 절친했던 재야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살해되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고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억울하게 사형 당한 1975년 여름 부터였습니다.
    늦봄은 이후 58세 때인 1976년 3·1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명동성당 <3.1 민주구국선언>을 첫발로 여러 차례에 걸친 옥살이를 시작했고, 그 때부터 늦봄의 집 거실 벽엔 간디의 글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글귀가 붙었답니다.
    늦봄은 이 사건으로 투옥되어 22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해 다시 수감, 1980년 5월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정권에 의한 '내란예비음모죄'로 3번째 투옥되었다가 31개월 만에 출옥, 1986년 인천5·3항쟁과 서울대 연설사건, 그리고 1989년 3월 26일 전국을 뒤흔든 방북사건, 1991년의 '분신정국'으로 재수감 될 때까지 어떤 감옥행도 두려워하지 않는 민주와 통일을 향한 열정의 삶을 살게 됩니다.
    늦봄은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교회' 목사(1983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 소위  '분신정국'에서 강경대 열사 등 많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 활동(1991년), 옥중에서 미국 친우협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1992년),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운동 제창(1993년),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1993). 등으로 시대의 어두움과 장벽을 불사르고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의 새벽을 여는 길을 앞서서 헤쳐 가십니다.
    늦봄의 해맑고 낙천적인 모습은 주위 사람뿐만 아니라 담당형사와 간수까지도 머리 숙이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아무리 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암울했던 시대-노동자, 농민, 양심수, 청년학생, 철거민 등 투쟁하는 약자 민중 곁 어디든지 달려가 그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눈물 흘렸습니다.

방북,성큼 통일의 길로

6번에 걸친 11년 2개월의 감옥생활도 늦봄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면서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늦봄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어떻게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대답이 바로 방북이었습니다. 늦봄은 통일이 앞당겨지면 민주화가 진전되고 그렇게 돼야 억울한 희생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치욕입니다. 해방 50주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만듭시다."
   1989년 3월, 늦봄은 통일의 물꼬를 트기위해 열흘간의 역사적인 북한 방문으로 김일성 주석과 2차례 회담 끝에 통일 3단계방안 원칙 <4.2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하고 돌아옵니다.
   이 합의는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0년부터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교류 협력사업,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한민족이 가져야 한다는 햇볕정책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늦봄의 통일이야기

" 그래 찬양·고무했다. 맨날 욕하고 그러면서 통일이 되겠어? 상대방의 좋은 점을 자꾸 찾아내 찬양 고무해야 하지 않겠어." (1989년 6월 26일. 방북사건의 첫 공판)
"분단 45년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얼마나 못났으면 남들이 들어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어놓은 선, 그게 뭔데 지우지 못하고 1백만의 군대를 남쪽과 북쪽에서 무장시켜 그것이 지워질세라 지키고 있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이다....45년 비극의 수치를 씻어내고 45년 분단의 비극을 청산하고 싶어서 갔다 왔다. 무엇이 잘못인가?"
   “이 민족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도시민과 농민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자로 등등 사회학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보아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회의 주종관계를 일소하는 일을 민주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지배자-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는 민족을 통일하는 일입니다.” (방북 관련 재판 상고이유서에서)
   "큰 장벽을 허물기 전에 작은 장벽부터 하나하나 허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뜻을 세우기 전에 작은 뜻부터 하나하나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통일을 이루기 전에 작은 통일부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일된 통일운동이 남과 북, 해외, 이렇게 삼면에서 분단을 무너뜨리려고 같이 조여들어 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이별, 겨레장으로

"통일은 다 됐어! 통일은 다 됐어요.";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통일의 전망과 희망을 증언하던 늦봄은 19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개소하고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18일 오후 8시 20분 자택에서 그만 세상을 뜨시어 모란공원 묘지에 모셔집니다.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와 강당, 감옥을 누비면서 '통일의 실마리를 풀지 않으면 또다시 외세에 크게 흔들릴 것이니 온 겨레가 통일에 떨쳐나서자'고 호소하던 늦봄 문익환. 그처럼 통일의 한 길을 거침없이 내달리던 늦봄....
   1월 22일 '겨레장'으로 치러진 늦봄의 장례에는 '통일의 날 돌아오소서'란 만장이 펄럭였고, 상여 위에는 태극기 대신 흰 바탕에 파란색의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깃발이 놓였습니다. '남북단일기'였습니다.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각계인사들이 애통해 했습니다.

가족과 저서

가족은 부인 박용길(봄길)님, 큰아들 문호근, 큰딸 문영금, 둘째아들 문의근, 세째아들 문성근 님 이십니다.
   저서로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1984),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걸어서라도 갈테야》(1990) 등이 있으며, 시집《새삼스런 하루》(1968),《꿈을 비는 마음》(1978)과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등이 있다. 그 밖에 산문집과 옥중서한집 등 1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문익환전집》(1999), 《문익환평전》(2004) 등도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