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좌익의 소리

"'공권력'이 지켜야 할 '공익'은 무엇인가"

이경희330 2009. 1. 28. 23:09

경쟁과 결정

용산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한나라당 대표도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대표들도 기타 수많은 시민들도 이것이 참극이라는 점에 관해 다투지는 않는다. 적어도 여기서는 지금 국민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통합은 없고 균열이다. 모두들 "이런 일 다시없기를" 바란다지만, 다시없기를 바란다는 그 "이런 일"이 무엇인지는 서로 생각들이 다른 것 같다. 그냥 쉽게 무력 시위도 없고 강경 진압도 없기를 바란다고 한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면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딱 한 꺼풀만 벗겨서, 무력 시위가 불가피했는지 아니면 강경 진압이 불가피했는지를 물으면 바로 진영이 갈라진다.

한쪽에서는 세입자들의 발언권을 무시하고 용역 "깡패"들의 행패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시공사와 행정당국의 철거 작전에 맞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려면 화염병이 불가피했다는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개인들의 세세한 사연까지 일일이 경찰이 챙겨줄 수는 없고 어쨌든 도심에서 남의 건물을 점거해서 농성하면서 화염병과 골프공을 던져대는 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다고 한다.

공공질서가 먼저인가 생존권이 먼저인가? 얼핏 보면 두 개의 가치가 전형적으로 경쟁하는 상황인 것처럼 보인다.

전체의 질서를 위해서는 일부의 생존권이 혹시 무시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시각에서 다시없기를 바라는 "이런 일"이란 곧 "도심 테러"와 "과격 시위"와 "전국철거민연합의 개입"과 "화염병"이다.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을 문책하라고 제안한 홍준표 의원에게 청와대에서는 "청소하다 접시 깬 것을 처벌하느냐?"고 반문한 정서가 그렇다 (<한국일보>, 2009년 1월 24일 "홍준표, 침묵 끝 '김석기 퇴진 불가피'").

반면에 생존권을 옹호하는 측에서 보면 점거와 농성, 즉 몸으로 버티기는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자원이다. 자기들이 합의하지 않은 보상 조건을 강요한다는 것은 세입자의 권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셈과 같다. 보상 조건에 합의하지 않아서 세든 집과 가게를 비우지 않고 점유하는데, 용역의 행패를 앞세워 철거를 강행한다면 몸으로 막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허우대에서나 완력으로나 용역에게 밀리니 동병상련인 전철연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경찰이 용역의 편으로 합세하니 화염병으로라도 무장할 수밖에 없다. 즉, 이 관점에서 화염병은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쳐들어오지 말라는 위협용 방어 무기가 된다.

생존권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17개월동안 망루 농성을 계속한 끝에 보상금 인상과 임대주택 입주권이라는 선에서 타협한 2004년 상도2동 재개발의 경우를 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해결책을 지주와 시공사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손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은 그래서 용산의 참사와 관련해서 "떼를 쓴다 해도, 보상 가격을 올린다든지, 낮춘다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2009년 용산과 2002~2004년의 상도동 사이에는 2005년의 경기도 오산 세교지구 농성이 있다. 보상가를 올려주는 타협이 아니라 54일 만의 강제해산으로 끝난 경우이다. 도중에 용역회사 직원 한 명이 화염에 싸여 숨지는 일이 있었고, 농성 도중의 충돌과 해산 과정에서 부상자도 있었다. 농성자들은 체포된 후 실정법에 따라 사법 처리되었다.

이런 경우에 공권력은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중립적인 입장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결정하더라도 이해당사자 각각에게 돌아갈 위신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금전이라는 경제적 가치가 달라진다. 세칭 "알박기" 지주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세입자들에게 농성이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개발 이익의 편에게는 시간이 비용이기 때문이다. 공기가 지연될수록 시공사에게 금융 비용이 발생하고, 따라서 지주들에 대한 보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보상 수준이 적정했느냐는 문제를 접어놓고 결과만을 두고 말한다면, 오산 세교의 경우는 철거민들의 분풀이를 위해 시공사가 54일치 기회비용을 부담한 셈이 된다. 그러므로 지주와 시공사는 할 수만 있다면 농성으로 인한 지연을 줄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2009년 용산과 같은 처리 방식은 문명사회에서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처참하다. 공권력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 공권력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뉴시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대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우선 내놓는 답은 거의 정해져 있다. "공권력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은 진부한 답이고, 많은 경우에 허망하기까지 한 답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학자의 한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절박한 요구에 따라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반드시 캐묻고 스스로 따져봐야 할 질문이다. 공권력이란 무엇인가? 공권력은 왜 필요한가? 공권력의 임무가 어디에 있는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국가폭력은 어디까지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을 온라인으로 한번 찾아봤더니 공권력을 "법률" 용어로 분류하고서, "국가나 공공단체가 우월한 의사의 주체로서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이라고 풀어놨다. "우월한 의사"라는 과감한 문구가 흥미로워서 혹시 일본어 사전에서 기원하지 않았나 <広辞苑>(岩波書店, 第五版, 2006)을 보니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인민에 대하여 명령하고 강제하는 권력"이다. "국민" 대신 "인민"을 쓴 것 말고는 똑같은 문장에서 "우월한 의사의 주체로서"만 빠진 형태다.

그래서 과거 일본어 사전에 "우월한 의사"가 들어있었고 그것을 예컨대 일제시대에 한국어 사전 편찬자가 특별한 의문 없이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남는다. 만일 해방 이후 한국어 사전들은 앞에 만들어진 풀이를 답습해 온 반면, 일본에서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면서 국가의 "우월성"이 본질적이지 않다는 자각이 사전 편찬에도 반영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현재 내 사정상 더 이상 탐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룬다.

사전에서 어떻게 풀이했든지 실제 현대 한국어 용례에서 공권력이란 대개 정부의 강제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본어 위키백과(ウィキペディア)에서 "경찰, 검찰, 재판소, 세무서, 군대" 등, 물리력으로 집행하는 정부의 통치 행위로서 복종하지 않으면 처벌된다고 푼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딱히 공권력이라는 표현은 없다. 훨씬 포괄적인 용어로 '정치 권력(political power)'이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훨씬 특정해서 강제력(coercion), 경찰력, 군사력, 무력(physical force) 등으로 말한다. 공권력을 자구대로 영어로 바꾸면 'public power' 비슷하게 되지만, 이런 표현을 그냥 쓰면 공기업 형태의 전력회사를 먼저 연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권력 앞에 "공"자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보는 데에는 정치의식의 깊은 부분에서 기인하는 까닭이 있다. 서구 특히 영미식 사고에서는 사회질서라는 것이 개인의 자율성에 봉사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공성이라는 것을 국가 본연의 임무로 보지만, 현실 국가가 임무를 다하지 못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국가가 "공공성"을 간판으로 내거는 것만으로써 곧 간판과 내용이 서로 합치된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음을 대부분의 시민이 자각하기 때문이다. 현실국가와 공공성이 합치하지 않을 때에는 개인들이 연합해서, 즉 시민사회가 공공성의 이름으로 현실국가를 개폐할 수 있다.

언제든 개인 또는 사회가 국가의 권력 행사에 대해서 공공이라는 명분에 부합하는지를 따져 물을 수 있다고 본다면, 권력에다가 공(public)이라는 감투를 하나 더 씌워줄 필요는 없다. 강제력이나 권력의 행사가 공공성에 부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권력이라고 하게 되면, 국가의 모든 권력 행사가 공공성에 실제로 부합한다는 듯한 의미가 슬그머니 섞여 들어간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그치고 다시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어 사전들에 따르면 공권력을 국가가 우월한 의사의 주체로서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하는 권력이라고 푼다. 사전 편찬자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 "우월"이라는 말을 집어넣었을까? 일단 세 갈래의 발상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략 각각 본원적 우월성, 물리적 우월성, 이익의 우월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본원적 우월성이란 국가가 개인 또는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보다 본래 우월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게 되면 그런데, 단지 국가의 통치 기제를 장악한 자의 변덕에 따라서 공공성의 의미가 춤을 추더라도 할 말이 없게 된다. 통치 기제를 장악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무엇이냐는 문제도 공공성을 통해 통제할 수가 없게 된다. 아울러 국가 통치기구를 장악하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하든지 공공적이라고 우길 수 있다는 말이 되고 만다. 어떤 수법을 쓰든 일단 권좌를 차지하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공공이라는 명분을 표방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한 어떤 비판의 여지도 논리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는 모든 시민들이 주어진 통치자에게 그저 복종하면서 만족한다면 유지되겠지만, 야심가들이 발호하든지 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자체를 장악하려는 경합이 발생한다면 대단히 불안정한 체제가 된다. 왕조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사회의 모든 독재 체제일수록 권력 투쟁 때문에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리적 우월성이란 국가가 개인이나 사회에 비해 물리적인 힘이 우월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보통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에서는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국가가 행사할 수 있는 물리력은 궁극적으로 인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충분히 많은 수의 개인이 국가 권력에 도전하고 항의하는 경우에는 국가보다 사회가 물리력에서 우월할 수도 있다. 국가의 정책을 모든 인민이 만장일치로 수긍하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다양한 이유에서 반대하거나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은 항상 있게 된다. 반대나 불만을 물리력만으로 억누르려 한다면 그들은 힘이 없는 한 겉으로 복종하겠지만, 은인자중 물리력을 통해 반격할 기회를 노릴 가능성이 상존한다. 즉, 공권력을 단지 물리적 우월성으로만 여기게 되면 정치사회는 끊임없는 무력 투쟁의 온상으로 전락하기가 쉽다.

결국 평화로운 정치사회를 원한다면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월성"이라는 것을 이익과 관련해서 찾을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공익"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개인만의 이익에 비해서 공공의 이익이 우월하다는 명분에서 공권력의 강제력이 정당화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세입자 퇴거를 용산처럼 강행하면 지주나 시공사에게는 이익일지 몰라도 쫓겨난 사람들에게는 이익이라고 보기 어렵다. 쫓겨난 사람들이 조용히 있어주면 나머지에게 이익이 될지는 몰라도, 쫓겨난 당사자에게 이익이라고 말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상도동처럼 해결하면 지주나 시공사 측에서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오산 세교처럼 해결하더라도 손해라고 느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다 이익이 되는 방향의 결정이나 정책이 어려운 치명적인 까닭은 "이익"이라는 것이 다분히 주관적이고 게다가 시기심이 섞이기 쉽다는 점에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 공익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이론적인 기준은 있을 수가 없다. 무엇이 공익인지는 그 자체로 현실 정치의 공방과 경쟁 안에서 사회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왕조나 독재 체제처럼 인민이 의견이 별로 없거나, 있더라도 발표할 기회가 별로 허용되지 않는다면 권력자가 공익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단은 통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결과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정권 자체가 뒤집힐 수 있다. 자유 사회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관해 시행 전의 예상부터 시행 후의 결과까지 온갖 종류의 논의와 비판과 옹호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정부가 제안한 정책에 사회적으로 너무나 심한 반대가 없다면 일단은 착수를 하게 된다. 여기에는 시행 도중에 언제라도 이유가 발생한다면 사업을 수정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는 대전제가 항상 바탕에 깔린다.

그렇다면 반대가 얼마나 심해야 정부가 정책을 철회할까? 이 문제는 그야말로 현실 정치의 실제 진행 과정에서 힘겨루기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예컨대 2008년의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는 상당히 강한 반대였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미국 쇠고기가 한국에 상륙하면서 치른 신고식에 그쳤다. 반면에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건설이나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사업은 사회적 반대에 부딪쳐서 저지되었거나 저지되고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물론 내가 지금 말한 "저지"란 실질 내용보다 명칭을 중요시할 때의 이야기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행정 "수도"에 집착하지 말고 단순히 행정 "중심 도시"를 추구했더라면, 반대파가 세력을 집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정비 사업"도 마찬가지다. 건설 사업을 통해 경기를 진작한다는 목표만을 본다면 "4대강 정비 사업"은 몇 가지 상징을 양보하고 목표를 추구하는 우회 전략이다. 단, 상징의 양보를 곧 위신 손상으로 간주해서, 종내 "대운하 사업"을 강행하게 된다면 앞날은 오직 그때 가서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야 이미 착수된 사업을 "수정"하거나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지 역시 현실 정치의 공방 그 자체와 같다.

국민이 반대하는 정책을 시행하면 안 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항상 맞지만, 달리 보면 항상 틀린다. 모든 국민이 정부 정책에 한 목소리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분석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려면, 국민 가운데 정부의 시도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한 일부가 반대하는 정책은 시행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는 그저 동어반복일 뿐이다. 모든 정책에는 반대 의견이 수반되기 마련이라고 보면, 사실 모든 정책은 국민 중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되는 셈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이라는 모호한 표현은 이런 경우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낫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