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역사관

조선의 사진!

이경희330 2005. 12. 5. 21:58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여성은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남자만이 학문을 하게 되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진출할 길은 전혀 없었다. 물론 관직에도 내명부라 하여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부인도 관품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권이 전혀 없는
오히려 여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외국처럼 결혼한 여자의 성을 없애는 일은 없었다.

조선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집안간의 결합이었으므로
각자의 가문에 대해서는 존중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조선전기에는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아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가 보편적이었다.
또한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특히 남녀간을 맺어 주는 결혼은 여성의 입장이 더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사회의 남녀 관계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전통사회의 결혼은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이 성립된 후의 조선시대 여성은 일반적으로 방갓을 쓰거나
장옷을 입고 얼굴만 조금 내민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집안일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농민과 하층민의 부녀자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가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여성이 바다에 나가 일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18세기 이후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민중의 생활상을 그려낸 풍속화를 중심으로
조선 여성들의 생생한 삶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여인네들이 사진 촬영을 꺼려했을 뿐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 촬영되어
대부분의 자료가 국외에 소장되어 있다는 시대적 특수성에 의해
빚어진 매우 귀한 자료입니다.
16세기 이후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여성을 삽화를 통해 살펴봄으로
우리 여성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승(1903년)

장승은 마을 어귀에 세워놓고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
또한 장승 앞에서 병의 치유를 빌던 풍습이 있었다.

장승이 7개
사람도 7명으로 각자 기원하고 있다.
간절한 소망과 소원을 얻기 위해선
굽어진 소나무로 된 것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신행길(1890년)

방금 시집으로 가려는 가마를 잡고
친정어머니는
딸에게 무엇인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여자궁도대회(1910)






기생 소릿꾼(1900년) 지금의 가수






기생의 나들이 (1903년)

전속 가마꾼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신랑 신부의 상면(1903)

신랑의 가족들이 호기심으로 신부를 보고 있으나
신부의 가족들은 근심이 가득하다.






시집으로 가는 신부(1903)

가마를 탄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구한말 결혼식(1903)

떠구지머리를 얹고 큰머리를 튼 후,
떠구지 댕기를 드리우고 큰 비녀를 꽂은 다음,
원삼을 받쳐 입고 혼례를 올리고 있다.

이 부부는 자식을 낳은 후
미국 선교사에 의해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다.






마을 장승(1900)

장승은 2개 세우는 법인데
마을 입구에 장승하나가 외로이 서있고
마을로 통과하는 전신주가 보인다.






다리미질(1900)

다리미질하는 이 여인은
의도적으로 젖가슴을 내놓고 있다.
이는 아들을 낳은 것을 자랑하기 위한 풍속이다.






다듬이질 하는 여인.







키질과 체질(1890)

우리여인들의 생활은 노동에 시달렸으며
곡식을 찧고 키로 까부리며 체질하여 밥과 죽을 쑤었다.






연자매(1900)

연자매는 맷돌을
소가 끌어 돌리게 하는 정미 시설이다.






맷돌(1904)

콩이나 메밀등을 넣어 갈아주는 수동식 믹서기다.






돗자리 짜는 노인(1900)

돗자리 짜기란
많은 고르랫돌을 매달아 한 가닥씩 엮어 나가는 작업이다






기녀위문(1905)

노일전쟁 당시 기녀들이
일본군 막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쪽 천막에 일장기와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토담쌓기(1905)

나무틀에 돌과 진흙을 혼합해서 쌓고,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휴식하고 있다.






김개남(1894)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을 이끌고 봉기했다.






기중기 도구(1900)

무거운 물체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성벽을 쌓는 돌 운반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여인의 가리개(1900)

여인이 왕골로 짠 가리개를 쓰고 나들이하다가
양손으로 가리개를 받쳐 외면하고 있다.






널뛰기(1920)

한말 때 여자가 바깥구경을 할 때에는
널을 뛰어 담장밖 세상을 구경했다.







장기(1890)

어린 소년처럼 보이나
초립을 쓴 것으로 보아 이미 장가든 모습이다.






한강여객선(1910)






남대문 전차 대기소(1919)

서울에 전차가 들어오면서
단발령 시행에 실패한 일본은
전차회사 직원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했다.

서양식 모자를 쓰게 하므로서 전차가 몰고
온 개혁 바람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바꾸어 놓고,
운전수는 강제로 일본식 제복을 입혔다.

백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헌(엄비)왕비 국상 시기이다






서울의 전차(1903)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워크의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1898년 12월 전기궤도 부설공사가 완공되었다.

준공 직후 소아 사고로 전차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지만
각지로부터 전차를 타보기 위해 서울로 몰려왔다.

정원은 40명이고,
중앙에는 양반이 이용하던 특실이 있었다.






마님나들이(1907)

가마꾼이 마님을 태우고 포목점 거리를 지나고 있다







마포 나루터(1910)

많은 새우젖 장수가 있고
상권이 모여있는 선착장 주변이다.

서울도성까지 얼마 안떨어져
항상 많은 물량이 거래되고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용산-인천 배삯은
상등은 2원 하등은 70전이며 증기선이 운항되었다.







경인선 기차(1910)

기차를 타보기 위해
승객들이 객차에 오르느라 소란을 빚고 있다.

기차를 처음타본 승객들은
기차가 정지하기 전 뛰어내려 사고가 많았다.







소방대 발족(1920)

왼쪽 높은 망루에
서울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긴급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 서당과 교육 >






1904년 개화기의 졸업식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두 훈장(선생님)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서있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당.






서당 풍경(1900)

장죽(긴 담뱃대)을 문 근엄한 훈장이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 공부를 못해 광에 갇힌
한 학생을 친구가 돌아앉아 위로하고 있다.






인천 일어학교(1894)

한국인 교사와 도포입은 학생
중앙에 일본인 교사도 보인다.






학동들의 야외학습(1904)

서당밖에 나와 야외학습을 하고 있는 광경.






서당풍경(1909)

훈장이 회초리를 들고
청마루에서 붓글씨를 감독하고 있다.






북간도 서당(1905)

어두운 방에서
플레쉬 없이 촬영한 것이 신기하고
모두 한결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이화학당(1910)

이화학당을 설립한
"서클랜드 부인"은 오른쪽에서 가사실습을 감독하고 있다.

앞줄에 신발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특색






여학교 실습(1910)

대구 동산 언덕에 있는
선교사 저택에서 실습 나온 신명여학생들이
소년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부(1930)

대구 덕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일본식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 촬영중

 

(사진연구가 정성길씨 소장품)



항아리 이고 가는 촌부 1900년대



이완용의 부인 (1880년대)



명성황후 1890년대



조선여인의 전통복장 1890년대



1890년대초창기의 이화학당 학생들



한국 여인1895-1901년



가족사진1900년대



결혼 예복을 입은 신부 1902-1903년



귀족 1900년대



기생을 지도하는 여인 1900년대



양반댁 여자아이



'조선 말 일제시대, 장안에 이름을 날렸던 기생 장연홍' 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새하얀 한복에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 짙은 눈썹에 순진해 보이는 눈,
도톰한 콧날과 작은 입술로 단아한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원래 개화기 조선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에 포함됐던 것이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의 모습이 한 네티즌의 눈에 띄어 여러 커뮤니티나 블로그사이트를 통해 보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실 여인 1900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1900년대



이화학당의 소풍행렬 1908년



일반 부녀자의 모습 1900년대



일본 장교와 두 기녀 1901



젖가슴을 드러낸 기생 1900년대



중산층 가족사진



신식결혼 1910년대



이화학당 졸업생들 1911년



조선회화: 달구경 '경직도 병풍' 중에서19세기 이후



서양인이 그림 조선여인"널뛰기



색동 겨울옷



조선여인의 식사



조선여인들의 빨래



죄 지은 여인의 매질 '행정도첩 (刑政圖帖)' 중에서19세기 말 작품



단오추천 '기산풍속화첩 (箕山風俗畵帖)' 중에서 19세기 작품



1780년 경 작품으로 추정 행상 '풍속화첩 (風俗畵帖)' 중에서



다림질 19세기 초 작품



춘야밀회 (春夜密會) 19세기



기방무사 (妓房無事)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조선회화: 청금상연 (聽琴賞蓮)'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여인풍속 (女人風俗) 18세기 작품

 

≪≪사진설명:작고한 정해창≫≫



 







조선시대 마을사람들




골목안 풍경



조선양반의 마을 행차







조선시대 시골풍경



조선의 아낙







여름 냇가에서



새참을 준비해온 아낙



조선의 산마을



소달구지를 끌고가는 풍경









마나님의 행차



조선여인들의 냇가 빨래하는 풍경



한양땅 골목안 풍경












운송수단으로 이용했던 당나귀



가을걷이의 풍경



일을 마치고서



조선여인



조선시대 바다를 건너던 돋단배






조선여인의 망중한



조선시대 나룻배



우물가 풍경



마을풍경







시장 사람들







조선시대 여인상











고관대작 마니님의 행차



조선시대 운송수단 목선















농가풍경



빨래터





 

정해창선생님소장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