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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씨 성 관향과 시조

이경희330 2006. 12. 6. 17:54
우리나라 이씨 성 관향과 시조


성(姓)의 하나. 본관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備考)》에는 451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546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00여 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141만 8945가구, 598만 5037명으로 총 274개 성 가운데 2위였다.

 

〔가리(加利)이씨〕

 시조는 이승휴(李承休). 고려 충렬왕 때 밀직부사·감찰대부·사림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承旨)에 이르렀다. 문헌이 없어 정확한 세계는 알 수 없다. 인구수 19(1985).

〔가평이씨〕

시조는 이인보(李仁輔). 신라 때 사람으로 선계는 중국인 이신이다. 《계해보(癸亥譜)》에 보면 관적이 완산(完山)으로부터 조종(朝宗)으로, 다시 가평으로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렀다는 《신축보(辛丑譜)》 서문의 소개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다림(李多林)이 가평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이 되었다는 《정유보(丁酉譜)》의 서문도 아울러 기록되어 있다. 인구수 1만 8623(1985).

〔강동(江東)이씨〕

시조는 이만욱(李萬郁). 1705년(숙종 31)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인구수 124(1985).

〔강양(江陽)이씨〕

 시조는 이초(李超). 고려 때 사재령(司宰令)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에 보면 이개지(李開之)의 후손인데, 합천이씨(陜川李氏)와 동원(同源)이라고 하였다. 인구수 4476(1985).

〔강진(康津)이씨〕

시조는 이진(李珍).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 1351년(충정왕 3) 지도첨의상의(知都僉議商議), 54년(공민왕 3) 평리(評理)가 되었다. 그의 선계는 신라 남해왕 때의 완(完)이라고 하는데 그 뒤의 계대를 잃어 이진을 시조로 하고 강진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인구수 6998(1985).

〔강화(江華)이씨]-여흥이씨 지파로서 여주이씨[驪州李氏]로 통일

시조는 이대평(李大平). 고려시대에 중랑장태보(中郞將太保)를 지냈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되었다. 그가 세거한 곳이 하음(河陰;강화의 옛 이름)이어서 후손들이 강화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3739(1985).

〔개성(開城)이씨〕

시조는 이차감. 고려 충숙왕 때 녹사령개성부윤(錄事令開城府尹)을 지냈으며 자손들의 세거지를 마련, 개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손자 이덕시(李德時)는 고려 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공신이 됨으로써 후손들이 개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7212(1985).

〔거창(居昌)이씨〕

시조는 이성곤(李性坤). 1759년(영조 35) 문과에 급제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 문헌의 부재로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을 알 수 없다. 인구수 548(1985).

〔결성(結城)이씨〕

시조는 이창욱(李昌旭). 조선 태종 때 호남제군진무대장군(湖南諸郡鎭撫大將軍)에 추증되고 결주군(潔州君;결주는 결성의 다른 이름)에 봉해졌다. 본관은 처음 이성(利城)이었던 것을 정조 때 결성으로 고쳤다. 인구수 5631(1985).

〔경산(京山)이씨〕

시조는 이덕부(李德富). 고려 중기 사람으로, 당시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의 전단(專斷)에 반대하여 1173년(명종 3) 경산부(京山府) 본아리(本牙里;지금의 星州邑 京山里)에 옮겨 살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7909(1985).

〔경주이씨〕

시조는 이알평(李謁平).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그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飡)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32년(유리이사금 9) 양산촌이씨(楊山村李氏)로 사성하였다고 하며, 536년(법흥왕 23) 문선공(文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무열왕 3)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를 알 수 없어, 이색(李穡)이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신라의 소판(蘇判)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 곧 기세조가 되었다. 한국의 이씨는 중국에서 귀화해온 몇몇 본의 이씨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의 후손에서 분관된 것으로, 합천이씨(陜川李氏)·차성이써(車城李氏)로 갈라졌다. 또 경주이씨의 중조인 이거명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져, 평창이씨(平昌李氏)· 가평이씨·아산이씨·재령이씨·우계이씨(羽溪李氏)·진주이씨(晉州李氏)·원주이씨(原州李氏)로 갈라져나갔다. 인구수 121만 7279(1985).

〔고령(高靈)이씨]=여흥이씨 지파로서 여주이씨[驪州李氏]로 통일

시조는 이헌(李憲). 고려시대에 예부상서 평장사(禮部尙書平章事)를 지낸 뒤 고령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고령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5062(1985).

〔고부(古阜―瀛州)이씨〕

시조는 이경조(李敬祖). 1064년(고려 문종 18)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으며, 후에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의 출신지에 세거하게 됨으로써 고부를 관향으로 삼았다. 고부이씨는 한때 관향이름을 고부의 다른 이름인 영주로 한 적이 있었는데, 1968년 간행한 《무신보(戊申譜)》에서 고부이씨로 통일하였다. 인구수 2만 1558(1985).

〔고성(固城―鐵城)이씨〕

시조는 이황(李璜). 고려 덕종 때 문과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란군의 침입 때 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고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철성은 고성의 옛이름이어서 철성을 관향으로 하는 이씨도 고성이씨와 같은 뿌리이다. 인구수 7만 5904(1985).

〔공주(公州―公山)이씨〕

시조는 이천일(李天一). 신라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벼슬을 거쳐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다. 《공주이씨세계도》에는 시조로부터 중시조까지의 소목(昭穆)이 뚜렷하며, 31세손 이백령(李栢齡)이 양산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로, 34세손 이자송(李子松)이 수원이씨(水原李氏)의 관조로 분적되었다. 공산은 공주의 옛이름으로, 오늘날 같은 관향이면서 공주라 하는 종문(宗門)과 공산이라 부르는 종문이 있지만 모두 동원이다. 인구수 3만 842(1985).

〔광양(光陽)이씨〕

시조는 이무방(李茂方). 고려 말 검교문하시중이 되었다.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광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280(1985).

〔광주(廣州)이씨〕

시조는 이당(李唐). 고려 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한편, 그의 선대 인물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보는 설(說)도 있다. 그는 칠원(漆原)에 세거해 온 호족의 후예로 신라조에 후손들이 벼슬을 하였는데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고려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가 준안(准?;지금의 광주) 호장(戶長)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광주이씨의 시조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려 왔다. 본관은 조상의 거주지 준안이 고려 성종 때 광주로 개칭되었으므로 광주이씨라 한다. 인구수 14만 1830(1985).

〔교하(交河)이씨〕

시조는 이진형(李震亨). 조선 숙종 때 예조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그 뒤 후손들이 교하를 관향으로 삼고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2405(1985). 〔금구(金溝)이씨〕

시조는 이주(李澍). 고려 때에 가선대부·홍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봉산군(鳳山君;봉산은 지금의 금구)에 봉해졌다. 그뒤 후손들이 금구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830(1985).

〔김포(金浦)이씨〕

시조는 이관중(李管仲). 조선시대에 형조참판을 지냈다. 《병진보(丙辰譜)》에 의하면 이관중은 임진왜란 때 김포에서 성천(成川)·현봉(玄峰)으로 피란한 뒤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김포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구수 1137(1985).

〔나주(羅州)이씨〕

시조는 이철우(李哲祐). 조선 세조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다. 그는 이색(李穡)의 7세손으로, 금성(錦城;나주의 옛이름)에 낙향하여, 세거의 터를 잡음으로써 나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구수 9383(1985).

〔남평(南平)이씨〕

시조는 이동말. 문헌이 없어 선계는 알 수 없으며, 이동말은 조선시대에 보조공신(補助功臣)·정헌대부(正憲大夫)·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고 남평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인구수 1306(1985).

 [농서(농서)이씨]

시조는 이장경(〔농서이씨李長庚). 선계는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그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서 요양성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원나라 왕이 그 공을 찬양하여 그와 조부인 이장경을 농서군공에 봉했으므로 후손들이 농서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328(1985).

〔단성(丹城)이씨〕

시조는 이현(李峴). 고려 고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등 요직을 겸했다. 조선시대 후손 이영보(李永寶)가 말년에 단성현에 세거의 터를 잡게 된 것이 연유가 되어 이때부터 단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2270(1985).

〔단양(丹陽)이씨〕

시조는 이배환(李盃煥). 고려 태조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뒤 세계가 실전되었다가 10세손인 이방규(李方揆)로부터 다시 이어졌고 15세손 이무(李茂)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제1차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단산은 지금의 단양)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단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인구수 1만 4343(1985).

〔대흥(大興)이씨〕

시조는 이연계(李連桂). 전주이씨의 후손으로, 이성계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만류한 것이 화가 되어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가 1403년(태종 3) 풀려나 대흥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면서 대흥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3050(1985).

〔담양(潭陽)이씨〕

시조는 이덕명(李德明). 선계는 신평이씨(新平李氏)이나, 고려 인종 때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지자, 그의 후손들이 신평에서 분적, 담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643(1985).

〔덕산(德山)이씨〕

시조는 이재술(李在述). 고려 명종 때 덕풍(德豊;지금의 덕산)의 호장(戶長)을 지내면서 터를 잡고 덕산을 관향으로 가문을 열었다. 인구수 7355(1985).

〔덕수(德水)이씨〕

시조는 이돈수(李敦守).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중손 이윤온은 봉익대부(奉翊大夫)·밀직사판도판서(密直使版圖判書) 등을 지냈고 덕수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덕수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인구수 4만 3505(1985).

〔덕은(德恩)이씨〕

시조는 이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뒤 덕은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그의 선계는 진위이씨(振威李氏)이며 그 상대(上代)는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후손인 이거명의 14세손이다. 인구수 2321(1985).

〔동성(東城―泗川)이씨〕

시조는 이식(李軾). 고려 충렬왕 때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되었으며, 그 뒤 담양교도(潭陽敎導)를 지낸 이자에 이르기까지 6대가 진사를 누렸다. 이들이 사천에서 거주하게 됨에 따라 사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동성은 사천의 옛이름으로 현재는 동성이씨로 관향을 통일하고 있다. 인구수 7098(1985).

〔벽진(碧珍)이씨〕

시조는 이총언. 신라 말 고려 초기의 호족. 신라 말기 벽진군(碧珍郡;지금의 성주)의 치안에 힘써 백성을 보호하였으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도움을 요청하자 18세의 나이인 아들 영(永)을 보내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삼한을 정복하는 등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이에 왕건은 그에게 삼중대광원훈(三重大匡元勳)으로 벽진장군에 올랐다. 그리고 손수 서신을 보내 자손에 이르기까지 고마운 마음을 변치않도록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양식을 비축하여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후손들이 벽진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8만 662(1985).

〔보성(寶城)이씨〕

시조는 이윤장(李胤章). 고려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세계를 알 수 없다. 한편 보성(保城)을 보성(寶城)으로, 윤장(胤章)을 윤창(允昌)으로 전하기도 한다. 인구수 508(1985).

〔봉산(鳳山)이씨〕

시조는 이수(李隨). 조선 태종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황해감사·병조판서·이조판서·집현전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봉산 토지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봉산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고려시대 사람인 이사빈(李士贇)을 시조로 하고, 이수를 중시조로 보는 설(說)도 있다. 인구수 6599(1985).

〔부안(扶?)이씨〕

시조는 이지발(李之發). 선대는 부안의 토착사족(土着士族)으로 전해지나 고증할 문헌이 없다. 6세손 이봉정(李奉禎)이 조선 때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보안군(保?君;보안은 부안의 옛 이름)에 봉해지자 부안을 관향으로, 계통이 확실한 이지발을 시조로 삼았다. 인구수 1048(1985).

〔부여(扶餘)이씨〕

시조는 이품(李稟). 고려 정종의 왕비 용목(容穆) 왕후의 아버지로 공부시랑을 지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764(1985).

〔부평(富平)이씨〕

시조는 이희목(李希穆).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4세손 이정공(李靖恭)이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짐으로써 부평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5090(1985).

〔삼척(三陟)이씨〕

시조는 이강제(李康濟).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세계나 본관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없다. 인구수 216(1985).

〔상주(尙州―商山)이씨〕

시조는 이민도(李敏道). 중국 농서 사람으로 한림학사로 있다가 원나라 말기에 난을 피해 동래(東來), 조선 개국 때 공을 세웠다. 상산군(商山君;상산은 상주의 옛이름)에 봉해졌으며, 태조의 명으로 본관을 농서에서 상주로 하였다. 인구수 4331(1985).

〔서림(西林―舒川)이씨〕

시조는 이익존(李?存). 고려시대에 흥록대부 호부상서(興祿大夫戶部尙書)에 올랐다. 18세손 이세공(李世公)이 고려공신이 되어 서림군(西林君;서림은 서천의 옛이름)에 봉해지고, 20세손 이언충(李彦忠)이 서주군(西州君;舒川의 딴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연안이씨(延?李氏)에서 분적, 이익존을 비조(鼻祖)로 하고 이언충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2152(1985).

〔서산(瑞山)이씨〕

시조는 이영모(李令謨).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를 지내고 부성군(富城君;부성은 지금의 서산)에 봉해져 후손들이 서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978(1985)

〔성산(星山)이씨〕

시조는 이능일(李能一). 신라 말 성산현 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이었다. 고려 건국에 수훈을 세웠으며,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 부마가 되고 벼슬은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뒷날 성산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6만 4735(1985).

〔성주이씨〕

시조는 이순유(李純由). 신라 사람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충절을 지켜 고려조에 나아가지 않고 지금의 성주읍 경산동(京山洞)에 옮겨가 숨어 살았다.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왕은 그를 경산부원군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므로 원의 황제가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으로 추봉하였다. 따라서 이장경을 중시조로 삼게 되었으며, 그가 농서군공이 되었기 때문에 농서이씨라고도 하였는데 그 뒤 가세가 크게 일어나 충렬왕 이후 성주목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라고 하게 되었다. 인구수 15만 3146(1985).

〔수안(遂?)이씨〕

시조는 이견웅(李堅雄). 경산(京山) 사람으로 왕건을 고려 태조로 추대하고 태조를 따라 견훤(甄萱)을 토평, 벽상공신이 되었다. 13세손 이연송(李連松)이 수안군에 봉함을 받아 계대하였으므로, 수안을 관향으로 한 뒤 이때부터 그대로 봉지(封地)를 따라 수안이씨라고 하였다. 인구수 1만 4099(1985).

〔수원이씨〕

시조는 이자송(李子松). 고려 우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해진뒤 수성부원군(隋城府院君;수성은 수원의 옛이름)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수원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수원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6374(1985).

〔순천(順天)이씨〕

시조는 이사고(李師古). 고려시대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과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지냈다. 순천을 계통으로 관향을 정하기는 고려 때 비롯되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고증할 수 없어 구보(舊譜)에 의하여 대언공(代言公) 이사고에서 시작한다고 범례(凡例)에 씌어 있다. 인구수 4644(1985).

〔신평(新平)이씨〕

시조는 이덕명(李德明). 고려시대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다. 한편 《무오보(戊午譜)》에 보면 시조는 백제 때 신평현(新平縣) 호장(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라고 했으나 계대와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다만 이름과 관직만을 적어 이씨의 연원을 삼는다고 하였다. 또 진무공신 신양군 묘갈명(振武功臣新陽君墓碣銘)에는 이덕명을 원조로 삼고 사재시령(司宰寺令)을 지낸 이덕배(李德培)를 중조로 한다는 구절도 있다. 인구수 2만 9281(1985).

〔아산(牙山)이씨〕

시조는 이주좌(李周佐). 신라 대아찬(大阿飡) 이알평(李謁平)의 후예로 5세조가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며,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승훈(李承訓)의 둘째 아들로 아산으로 분적하여 아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기계(起系)는 200여 년 뒤의 인물인 이서(李舒)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인구수 1만 403(l985).

〔안산(?山)이씨〕

<경기계>

시조는 이인수(李仁守). 조선시대에 별시위(別侍衛)를 지냈다. 선계는 연안이씨로, 그가 안산군에 거주하면서 연안이씨에서 분적하여 이인수를 시조로, 본관을 안산으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철산계>

시조는 이희적(李希勣). 고려 고종 때 철산방어사를 지냈다. 몽골의 살리타이군을 맞아 싸우다 순국하였다. 그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안산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그러므로 경기계와 철산계는 다른 계통이다. 인구수 양계 합계 4973(1985).

〔안성(?城)이씨〕

시조는 이중선(李仲宣). 고려시대에 경군호장(京軍戶長)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큰 업적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랐고 삼국모와 더불어 이자의(李資義)의 역모를 평정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되었으며, 백하군(白夏君;백하는 안성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이런 연유로 자손들이 안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7546(1985).

〔안악(?岳)이씨〕

시조는 이견(李堅). 고려 공민왕 때 검교문하대승상장군(檢校門下大丞上將軍)을 지냈다. 안악이씨는 상계의 소목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시조에 관한 서로 다른 주장이 엇갈려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이극규(李極奎)를 시조로 하는 주장이 있다. 인구수 7973(1985).

〔양산(梁山)이씨〕

시조는 이만영(李萬英).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개국 후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 이전생(李全生)이 양산에 정착, 이전생의 아들 이징석(李澄石)이 양산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양산을 관향으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4517.

〔양산(陽山)이씨〕

시조는 이천일(李天一). 신라 때 공산군(公山君;공산은 公州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는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시조이기도 하여 공주이씨와 양산이씨가 동원(同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산과 공산이 갈린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이들 족보의 손록(孫錄)이나 세계표(世系表)에서 분관역혁을 볼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34세 이교송(李喬松)은 공산이씨로 분적되었고, 아우 이자송(李子松)은 수원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31세 이백령(李栢齡)은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져 양산이씨로 분관되었다. 43세 이항무(李恒茂)가 세조 때 양산군에 봉해져 양산이씨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인구수 4517(1985).

〔양성(陽城)이씨〕

시조는 이수광(李秀匡).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시대에 동래하여, 문종 때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다.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난을 평정하여 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데 연유한다. 인구수 3만 8302(1985).

〔양주(楊州)이씨〕

시조는 이석숭(李碩崇). 진사(進士)를 지낸 양주의 토착사족이라 전하나, 문헌이 없어 세계는 알 수 없다. 인구수 1268(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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