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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위 계승도 (참고문헌 : 삼국사기)

이경희330 2008. 9. 11. 13:33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고구려는 졸본(卒本) 지방에서 BC 37년 개국하여 AD 668년까지 28명의 황제, 70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전역을 근거지로 하여 연해주(沿海州) 지역, 중국 하북성(河北省)과 산동성(山東省), 북경 인근까지 넓은 영역을 차지했던 고대 제국(帝國)이다.

고구려는 멸망한 후에도 꾸준히 국토수복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결국 고구려의 장군 출신인 대조영이 698년 발해를 건국하여 고구려는 다시 부활하게 된다.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시대를 형성하며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이어나갔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화려한 문화를 근간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으며 당과 대등한 관계에서 일본과 문화교류를 활발히 하는 등 고구려의 영화를 그대로 재현하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나갔다.

 

[ Tip ]

->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는 고구려의 중기 즈음에 통치하신분이며, [고국**] 으로 이름으로 시작하는 왕도 3분이나 계시다.

 

-> 사후  묘호에서 영토 점령이란 의미보단 미개한 곳을 문명화시키고 널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개척했다는 개토(開土)’가 쓰여진 것은 이같은 특징들에 기인한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 역사 안에 이 위대한 태왕이 갖는 의미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 연개소문(666년 사망)은 고구려의 멸망시기 즈음에 활약한 장수이다.  

 

계   보  도

 

 

 

1대 고주몽(高朱蒙), BC37-BC19년, 연호 다물(多勿) : 다물왕(多勿王)

동명대제(東明大帝) - 추모성왕(鄒牟大帝)


2대 고유리(高類利), BC19-AD18년 

유리명왕(榴璃明王) - 유류명왕(儒留明王)


3대 고무휼(高無恤), 18-44년

대무신왕(大武神王) - 대주류왕(大朱留王)


4대 고색주(高色朱), 44-48년

민중왕(閔中王)


5대 고우(高憂), 48-53년

모본왕(慕本王)


6대 고궁(高宮), 53~146년, 연호 융무(隆武) : 융무대왕(隆武大王)

태조대왕(太祖大王) - 국조왕(國祖王)


7대 고수성(高遂成), 146~165년

차대왕(次大王)


8대 고백고(高伯固), 165-179년

신대왕(新大王)


9대 고남무(高南武), 179-197년

고국천왕(故國川王)


10대 고연우(高延優), 197-227년

산상왕(山上王)


11대 고우위거(高憂位居), 227-248년

동천왕(東川王) - 동양왕(東襄王)


12대 고연불(高然弗), 248-270년

중천왕(中川王) - 중양왕(中襄王)


13대 고약로(高藥盧), 270-292년

서천왕(西川王) - 서양왕(西襄王)


14대 고상부(高相夫), 292-300년

봉상왕(烽上王)


15대 고을불(高乙弗), 300-331년

미천왕(美川王) - 호양왕(好壤王)


16대 고사유(高斯由), 331-371년, 연호 연수(延壽)

⇒ 연수왕(延壽王)

고국원왕(故國原王), 국강상왕(國岡上王), 소열제(昭列帝)  


17대 고구부(高丘夫), 371-384년

소수림왕(小獸林王),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18대 고이련(高伊連), 384-391년

고국양왕(故國壤王)


19대 고담덕(高談德), 391-413년, 연호 영락(永樂) : 영락제(永樂帝)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20대 고거련(高巨連), 413-491년, 연호 건흥(建興) : 건흥대제(建興大帝)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


21대 고나운(高羅雲), 491-519년, 연호 명치(明治) : 명치대제(明治大帝)

문자명호태황제(文咨明好太皇帝)


22대 고흥안(高興安), 519-531년

안장황제(安臧皇帝)


23대 고보연(高寶延), 531-545년, 연호 연가(延嘉) : 연가제(延嘉帝)

안원황제(安原皇帝)


24대 고평성(高平成), 545-559년, 연호 영강(永康) : 영강제(永康帝)

양원황제(陽元皇帝), 양강상호황제(陽崗上好皇帝)


25대 고양성(高陽城), 559-590년, 연호 대덕(大德) : 대덕제(大德帝)

평원황제(平原皇帝), 평강상호황제(平崗上好皇帝)


26대 고원(高元), 590-618년, 연호 홍무(弘武) : 홍무대제(弘武大帝)

영양무원호태황제(瓔陽武元好太皇帝)


27대 고건무(高建武), 618-642년, 연호 함통(咸通) : 함통제(咸通帝)

영류황제(榮留皇帝)


28대 고장(高臧), 642-668년, 연호 개화(開化) : 개화제(開化帝)

보장황제(寶臧皇帝) 

 

1대  동명성왕

서기전 58∼서기전 19
고구려의 시조왕
재위 서기전 37∼서기전 19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즉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 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2대  유리왕

?∼18(유리왕 37)
고구려 제2대 왕
재위 서기전 19∼서기 18

기원전 19년에 어머니 예씨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본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인정받고 고구려 제2대 왕이 됨

기원전 17년에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음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음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 또는 누리(累利)이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동명왕 주몽(朱蒙)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3대   무신왕

4(유리왕 23)∼44(민중왕 1)
고구려의 제3대왕
재위 18∼44
유리왕의 셋째 아들.

일명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어머니는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14년에 태자로 책봉됨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킴

그 해 개마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함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함

 

4대   민중왕

?∼48
고구려 제4대왕
재위 44∼48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인데 《삼국유사》에는 ‘해’를 성씨로 보고 있다.
대무신왕의 아우.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함

유언에 따라 민중원 석굴에 장사를 지냄

《삼국유사》에는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아들이며 모본왕의 동생이라고 되어 있다.

  

5대  모본왕

?∼53
고구려 제5대왕
재위 48∼53대무신왕의 아들.

49년에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음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

결국 신하 두로에게 피살됨

그런데 궁의 성은 고씨(高氏)이므로 모본왕을 마지막으로 하여 소노부(消奴部)

출신의 유리왕계의 해씨왕시대(解氏王時代)는 끝이 나고

계루부고씨(桂婁部高氏)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다고도 본다
 

 

6대   태조왕

47(민중왕 4)∼165(차대왕 20)
고구려 제6대 왕
재위 53∼146

이름은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56년에 동옥저를 정벌,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함

72년에는 부족장인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함

121년 한나라의 요수현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영토를 넓힘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함

165년,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 됨

 

7대   차대왕

71(태조왕 19)∼165(차대왕 20)
고구려 제7대 왕
재위 146(혹은 121)∼165
태조왕의 동생.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함

147년, 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함

 


 
8대   신대왕

?∼179(신대왕 15)
고구려 제8대왕
재위 165∼179태조왕의 계제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형인 차대왕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함

166년 좌·우보의 직제를 국상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

169년 한나라의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함

170년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함

  
 

9대   고국천왕

?∼197
고구려 제9대왕
재위 179∼197(또는 199)

 

이름은 남무(男武). 국양왕(國襄王) 또는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신대왕(新大王)의 둘째아들이다. 176년(신대왕 12)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신대왕이 죽은 뒤 국인(國人)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10대    산상왕

?∼227(산상왕 31)
고구려 제10대왕
재위 197∼227

이름은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다. 《삼국사기》에는 일명 위궁(位宮)이라 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산상왕의 아들인 동천왕의 일명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인 그는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于氏)를 비롯한 귀족세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208년에 서울을 환도(중국 퉁거우 지방)로 옮김

217년에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함


 

11대    동천왕

209(산상왕 13)∼248
고구려 제11대왕
재위 227∼248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인데,

위궁이라는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물을 본 것이

할아버지 뻘인 태조왕 궁(宮)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아명은 교체(郊)이다. 산상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산상왕 소비(小妃)이다. 성품은 관대, 인자하였다.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12대   중천왕

224(산상왕 28)∼270(서천왕 1)
고구려 제12대 왕
재위 248∼270

이름은 연불(然弗). 동천왕의 아들이다. 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왕비는 연나부(椽那部) 출신으로 짐작되는 연씨(椽氏)이다.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13대   서천왕

?∼292(서천왕 23)
고구려 제13대왕
재위 270∼292

이름은 약로(藥盧) 혹은 약우(若友)라고 하였다.

중천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255년(중천왕 8)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왕비는 서부대사자(西部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이다.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14대    봉상왕

?∼300(봉상왕 9)
고구려 제14대왕
재위 292~300

일명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矢婁)라 하였다.

 서천왕의 아들로 태어나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았다.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15대   미천왕

?∼331(고국원왕 1)
고구려 제15대왕
재위 300∼331

일명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乙弗)·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이며 서천왕의 손자이고,

고추가 돌고(固)의 아들이다331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함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16대 고국원왕

?∼371
고구려 제16대왕
재위 331∼371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하며,

한때 ‘소열제(昭烈帝)’라 칭하기도 하였으며,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유(劉), 교(釗)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미천왕,

어머니는 주씨부인(周氏夫人)이다. 314년(미천왕 15) 정월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17대 소수림 왕

?∼384(소수림왕 14)
고구려 제17대왕
재위 371∼384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8대 고국양왕

?∼391
고구려 제18대 왕
재위 384∼391

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19대 광개토왕

374(소수림왕 4)∼413(광개토왕 23)
고구려 제19대왕
재위 391∼413

재위기간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

412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414년 능(陵)에 옮겨 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輯安縣)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으며, 능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대 장수왕

394(광개토왕 4)∼491(장수왕 79)
고구려 제20대 왕
재위 413∼491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

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21대    문자왕

(491∼519) 
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함 
 22대    안장왕

(519~531) 
이름은 흥안. 치세는 12년간.

23대    안원왕

(531~545) 
이름은 보영. 치세는 14년간.

24대    양원왕

(545∼559)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25대   평원왕

(559∼590) 

양원왕의 태자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함

일찍이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함 
 26대    영양왕

(590∼618) 

평원왕의 태자.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섬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함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함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을 함락함

612년 수나라 양제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적을 섬멸함 
 27대    영류왕

(618∼642) 
영양왕의 이복동생.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된 이들을 찾아옴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됨 
 28대   보장왕

(642∼668) 
고구려의 마지막 왕.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함

661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함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당나라로 압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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