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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하는 이재오를 위한 친구의 변명

이경희330 2008. 3. 25. 01:31
이재오는 민주와 평등을 위해서 순주하게 투쟁했다
 
윤소암 시인/평론가
 
 내가 이재오를 처음 만난 것은 87년 여름이었다. 부산에서 불붙은 6.10항쟁이 전국을 뒤흔들고 난 후 노태우가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선언한 뒤였다. 재야 민주화의 사령탑인 민통련 전국모임에서 나는 부산 민주화대표로 참석했다. 역시 재야원로인 계훈제 민통련의 의장이 사회를 봤고, 내 옆에는 전 방송위원 성유보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전 국무총리 이해찬이 앉아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쟁쟁한 투사들의 격론은 가열되었다. 아마 그때 주제가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와 비판적 지지가 이슈였던 까닭이다. 그 전 해 모임에서는 문익한 목사와 백기완 선생이 참석했는데, 그때는 그 분들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능력은 없으나 열정 하나만은 남 못지않은 내가 용감하게 문제제기를 했는데, 요지는 김영삼, 김대중으로 양분되는 민주화의 영호남 세력이 갈라서고는 군사독재 정권을 절대 이길 수 없으므로 단일화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 같다.

이에 옆의 성유보와 멀리 대각선 방향의 이재오가 일어나서 나의 말을 지지하고 옹호하였다. 그때 이해찬은 비판적 지지를 강변하였으나 찬성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나중에 손을 들어 의사결정을 했지만 단일화와 비판적지지가 8대 2로서 단일화가 채택되었으나, 민통련 집행부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말았다.

세월이 흐른 뒤 강만길 교수가 지적한 대로 김영삼, 김대중 양대 지도자가 마음을 비우고 통합해서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갔더라면 영호남의 분열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모순과 비리가 발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은 분명 민주화 세력의 편가르기요 지역과 계층 간의 갈등을 심화시킨 역사발전의 후퇴였다. 정치지도자의 그릇된 선택과 탐욕의 업보는 오늘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이재오는 출감하는 날이라 했다. 대학생 시절인 6.3 운동 때부터 5.6공에 이르는 30여년을 그는 독재정권에 저항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민중혁명의 선구자로서 젊음을 바쳤다. 감옥도 숱하게 드나들어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10년이라는 장기간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남민전의 핵심인사로 시인 김남주와 함께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다.

나는 승려로서 세상의 질곡을 뛰어넘는 출세간의 신분 때문에 세간의 고통을 관조하는 입장이어서 마음의 고뇌와 고통을 무수하게 느낀 터였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고통은 적었다. 만일 내가 수행자가 아닌 세간에 있었더라면 그들과 함께 사회정의와 민중해방을 위한 활동으로 감옥행도 기꺼이 감수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해서 저항 심리와 정의감이 강한 나로서는 절 집안에 있으면서도 사회 부조리와 인간 고통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말과 이론에 능한 사람들은 흔히 어떤 이념이나 사상의 틀에 집어넣어 도식화하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정치적 수식이나 흑백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좌우파의 이념대결은 서구사회에서의 선악구도나 종교분쟁 같은 것으로 정치권력적 지배논리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자연이다. 그리고 평등이고 평화의 관한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정正이고 선善 이며 아름다움美이다. 반대로 이것을 파괴하고 훼손하면 반反이고, 불의不義이며 악惡일 것이다. 인류역사 5천년은 그만두고 근현대 100년 역사를 보면 자유 민주주의가 발전 되었다고는 하나,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라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가치관의 붕괴 아닌가!

이재오가 젊은 날의 사상투쟁과 독재항쟁에 온 몸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의가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고, 그런 그가 인생후반기인 50대에 우파 정치인이 된 것은 반대로 힘이 정의라고 믿은 발상의 전환 때문이 아닐까!

대문호 이병주는 인간의 삶이란 월광에 비추이면 신화가 되고 일광에 쏘이면 역사가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20대에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면 바보고 40대에 마르크시스트로 남아있으면 미친놈이라는 말을 했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 이병주의 글로 많은 교훈과 위안을 받았으며 몇 번씩 정중한 대접을 받고서도 가까이서 선생의 위대함을 느끼지 못해 버릇없던 불찰을 사과드린다.

이재오가 민주혁명의 선봉장으로 민주화진영의 대변인으로서 좌파부대의 장수로서 일세를 호령한 것은 대장부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요, 40대 중반부터 신화의 시대에서 역사현장의 무대로 옮겨 우파정치인으로 성공한 것은 이병주의 공식이나 헤겔의 변중법 철학에 따르면, 지극히 정상적인 발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선이 다르고 조직이 다르다 해서 조상의 뿌리까지 파헤치는 사상검증을 하려 든다. 조선조의 당파싸움이나 중세 및 근세까지 지속된 기독교의 마녀사냥 같은 정치권력의 논리인 탓이다.

김대중을 지지하던 급진 좌파진영에서는 대표적으로 이재오, 김문수, 제정구, 이부영 등이 김영삼 우파진영으로 갔다고 해서 변절자로 낙인찍고, 좌파언론들마저 그들의 일거수 일투 족을 감시하고 취재했다. 김대중 정권시절 내가 직접 그들과 있을 때 목격한 일이다. 반대로 민자당, 한나라당의 우파진영에서는 수구보수파들의 표적이 되었다. 걸핏하면 이재오를 비롯한 운동권 정치인을 좌파라 몰아세우면서 색깔론을 제기했다. 견디지 못한 중도보수 일부는 김대중 정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나이로나 경륜으로 따져도 한참 아래인 박근혜는 당대표를 했다는 것 말고는 잘난 것이 없는데, 이재오한테 머리를 숙이고 과거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했다. 민주화했다는 한 가지 잘못으로 피 끓는 청춘들을 박정희의 절대권력은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거나 죽인 업보가 있지 않은가! 흔히 극우지식인들은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하지 못했고 오히려 숭배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좌파인사들의 목숨을 건 고통에는 함구하는 비겁함을 보이고 있다. 

국회의원 3선의 이재오는 지금 시련기를 맞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서울시장에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그는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언론이나 야당이 그를 집권당의 실세니 권력의 2인자로 부르기 좋아한다. 대통령 취임이 후 2개월 만에 치르는 총선 문제로 지금 야당도 그렇지만 한나라당은 더욱 공천의 홍역을 앓고 있다. 공천혁명이라는 말대로 현역의원을 대폭 교체하고 새 인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계파갈등이 불거져 나온다.

실제로는 이재오가 추천한 인사들이 대거 탈락했음에도, 이재오를 견제하는 당내 간부들은 상당수 자기 계파를 챙겼으면서도, 책임론이 불거지자 이재오에게 화살을 돌린다. 야당은 야당대로 대선 설욕의 분풀이로 이재오의 지역구의 후보단일화로 이재오를 낙선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권력 2인자가 아직 되지 못했고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지 않았음에도 언론과 야당은 물론 유권자들까지 이재오 죽이기를 경쟁적으로 하고 있다. 인물을 키우지 못하는 반도백성들의 운명이라 할까...

이명박 초대내각과 청와대 비서관 인선에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으나 책임자는 말이 없고 인선에 간여하지 않는 이재오는 희생양으로 덤터기를 쓰게 되었으니, 이러고서도 한국정치가 발전 할 수 있겠는가. 1백만 대군을 지휘하는 관우, 장비 같은 맹장을 정치권력과 국민의 이름으로 죽이겠다는 한국의 현실정치가 성공할 수 있을까. 반듯이 실패할 것이다.

역대 정권에서 보아오듯이 권력의 친인척을 멀리해야 한다. 이 대통령도 늘 말한 것처럼 혈연, 지연, 학연을 타파하고, 인재를 널리 구하며 정치적 대의를 지켜서 나라와 국민을 수호하는 국정철학의 소신을 가져야, 이명박 정부가 성공 할 수 있다.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삶아 공명정대한 사람, 남의 고통을 헤아리는 사람, 이재오 같이 혁명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사람들과 함께 가야 대통령과 국민이 다 함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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